(71)진주 하씨(晋州河氏)-121,054명
(71)진주 하씨(晋州河氏)-121,054명
  • 정복규
  • 승인 2014.09.12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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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하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3개 파가 있다. 고려 목종 때 중랑장으로 있으면서 거란과의 분쟁에서 항절사로 목숨을 바친 ▲하공진(河拱辰)을 시조로 하는 시랑공파, 고려 정종과 문종 때의 ▲하 진(河珍)을 시조로 하는 사직공파, 하 진보다 조금 후대의 ▲하 성(河成)을 시조로 하는 동정공파가 있다. 진주를 본관으로 한 연유는 하공진이 진주에서 태어났으며, 하 진의 9세손 하 집도 이곳에 오래 살면서 후손들의 세거지가 됐기 때문이다. 진양(晋陽)은 진주의 옛 이름이다. 따라서 진양과 진주는 같은 본관이다. 그러나 지금도 진양을 본관으로 쓰는 후손들이 많이 있다.

하 륜(河倫, 1347~1416)은 시랑공파 시조 하공진의 11세손이다. 그가 46세가 되던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1393년(태조 2) 하륜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충청도 계룡산이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될 뻔했다. 하 륜은 계룡산의 형세를 비운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고 주장하여 천도 계획을 중지시켰다.

1398년(태조 7) 7월 하 륜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기 전 송별연이 열렸다. 이방원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하륜은 술에 취한 척 하면서 상을 뒤엎어 음식이 이방원의 옷자락에 엎질러지게 한다.

이방원이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자 하 륜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하 륜은 “대군, 일이 급합니다. 장차 이 나라에서 오늘 밤 술상이 엎질러졌던 것과 같은 사건이 생길 것 입니다”하고 이방원에게 난을 일으키도록 재촉하였다. 이방원은 함께 밀실로 들어가서 난을 꾸미게 되었다. 이것이 제 1차 왕자의 난이다. 갑작스런 습격을 받은 정도전은 두 아들과 함께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참히 죽었다. 하륜 등은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박포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 이방간을 유배시켰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단계(丹溪) 하위지(1412~1456)는 시조 하성(河成)에서 갈라진 단계공파의 파조다. 그는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의 측근들에 의해 강압을 받아 양위하자, 성승, 유응부, 성삼문, 김질 등과 함께 세조 3부자를 타살하고 단종 복위를 거사하기로 모의했다. 그러나 성균관사예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세조는 하위지의 재능을 아까워하여 친히 국문을 하면서도 여러 번 그에게 회유를 권고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사후 그의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두 아들이 사형을 당했다. 미성년자인 조카 셋이 살아남아 그 중 동생 하기지의 아들 하원이 양자가 되어 대를 이었다.

하규일(河圭一)은 구한말의 국악사로 무용에도 유능했으며 가곡의 정통을 지켰다. 하란사(河蘭史)는 여류 선각자로 미국 유학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북 익산시 춘포면 출신인 하경덕(河敬德.1897〜1951)은 교육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전주신흥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최초의 한국인 사회학 박사가 되었다.

현대 인물은 하영기(한은총재, 산업은행총재), 하진수(서울은행장, 동남증권회장), 하근찬(소설가), 하대돈(서울올림픽조직위원), 하덕모(동국대교수, 식품과학학회장), 하두봉(서울대교수, 동물학회장), 하무근(부산지검특수부장검사), 하성환(수산청어업진흥관), 하순봉(국회의원), 하영구(서울대교수), 하영석(경북대인문대학장), 하원대(시그너스 사장, 평창기업 사장), 하종현(홍익대미술대교수), 하현강(연세대사학과교수), 하만복(국회의원), 하을춘(국회의원), 하상용(대한석탄공사 총재), 하갑청(육군소장), 하경철(변호사), 하겸진(한학자), 하삼식(경남경찰국장), 하종락(한학자), 하성재(국문학자), 하태환(국회의원), 하종홍(변호사), 하영진(진주여고, 배명중고등학교설립자), 하순식(사천여고 설립자), 하상훈(국회의원), 하기수(의학박사), 하대유(의학박사), 하동훈(숙명여대교수), 하정수(의학박사), 하희주(시인), 하위(의학박사), 하점생(서울시교육감), 하재구(전매청장), 하경근(정치학박사, 중앙대총장), 하남호(화가), 하동산(조계종종정), 하동주(서예가), 하두연(부산대교수), 하두철(의학박사, 서울간호전문대설립자), 하성진(경북대교수), 하영철(경북대교수), 하유상(극작가), 하인두(화기), 하인호(전남대교수), 하재성(의학박사), 하상도(육군중장), 하재현(영남대교수), 하태신(광흥경금속 회장), 하태호(광양광업 사장), 한한식(서예가), 하병구(경희대교수), 하호성(경상대교수), 하태(우미나일론 회장), 하장춘(통일원남북대화사무국대표위원), 하임구(갱생보호회장), 하유상(현대극작가협회장), 하완식(서울대교수), 하영석(경농사장), 하석준(민족통일중앙협의회사무처장), 하동철(서울대서양화과교수), 하대유(전북대의대교수), 하대교(관광공사 사장), 하국환(금융연수원장), 하기주(코오롱 사장), 하반영(화가), 하수경(전주대미술대 교수) 씨 등이 있다. (무순, 전·현직 구분 안 됨)

항렬자는 26世 현(賢) 수(秀), 27世 운(運) 도(圖), 28世 재(載) 치(致), 29世 진(鎭) 준(駿), 30世 영(永) 석(錫), 31世 근(根) 태(泰) 제(濟), 32世 근(根)이다.

전남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는 집성촌이다. 하진으로부터 17세손인 하린(河潾)이 1550년대 진도의 창녕조씨 집안의 사위가 되면서 정착했으며 통덕랑공파라고 불린다. 진도군 임회면 봉상리에도 많다. 하린의 숙부 하익창(1495~1557)의 후손들은 진도군 고군면 향동리에 많으며 흔히 고군 향동파라 불린다.

하공진의 후손은 경남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운문,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에 많다. 하 진의 후손은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본관 진주는 경상남도 진주시의 지명이다.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진주 본관 성씨는 강(姜), 강(康), 강(彊), 고(高), 곽(郭), 교(橋), 권(權), 김(金), 노(魯), 동방(東方), 류(柳), 모(牟), 박(朴), 배(裵), 백(白), 사(謝), 서(徐), 서(西), 소(蘇), 소(邵), 오(吳), 유(劉), 유(兪), 윤(尹), 이(李), 임(林), 임(任), 장(張), 전(全), 정(鄭), 정(丁), 조(曺), 조(趙), 주(朱), 진(陳), 진(秦), 채(菜), 최(崔), 탄(彈), 하(河), 한(韓), 형(邢) 등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144명이 있다. 문과 36명, 무과 32명, 사마시 73명, 율과 3명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진주하씨는 1985년에는 총 35,563가구 148,233명, 2000년에는 총 37,744가구 121,05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2천여 가구가 늘어났다. 반면 인구는 2만7천여 명이 줄어들었다. 조사 과정에서 어떤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28,746명, 부산 24,409명, 대구 11,417명, 인천 4,313명, 경기 12,137명, 강원 3,092명, 충북 3,184명, 충남 7,132명, 전북 9,282명, 전남 10,760명, 경북 11,765명, 경남 21,083명, 제주 888명이다. 부산, 경남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26,055명, 부산 10,421명, 대구 9,153명, 인천 6,742명, 광주 3,379명, 대전 3,130명, 울산 3,130명, 경기 21,400명, 강원 2,359명, 충북 2,994명, 충남 3,663명, 전북 6,822명, 전남 4,699명, 경북 9,433명, 경남 6,905명, 제주 769명이다. 1985년에 비해 부산, 경남 지역의 인구가 절반 이하로 크게 줄어들었다. 본관을 진주에서 진양으로 많이 옮긴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1985년에는 총 7,674가구 30,633명, 2000년에는 총 22,961가구 71,81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가구는 무려 3배, 인구는 2배 이상이나 크게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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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정복규 프로필

● 전북매일 편집국장, 논설위원

● 익산신문 사장

● 현재 새전북신문 수석 논설위원

● 현재 성씨 전문강사(한국의 성씨를 통한 역사탐구)

 ( 저 서 )

• 한국의 성씨: 성씨를 찾아서

• 한국의 성씨: 1,2권

• 칼럼집: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핸드폰이 세상을 지배한다/ 개성있는 인재를 키워라

• 유머집: 각하 코드를 맞추세요

● 핸드폰: 010- 5162- 8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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