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무안 박씨(務安朴氏)-78,817명
(98)무안 박씨(務安朴氏)-78,817명
  • 정복규
  • 승인 2014.09.15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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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박진승(朴進昇)은 신라 경명왕의 여섯 째 아들 완산대군 박언화의 5세손이다. 그는 고려 초 나라에 공을 세워 무안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정착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무안을 본관으로 삼았다.

박진승의 아들 박 섬은 고려 현종 때 공신이며 명신으로 이름이 났다. 그의 증손으로 당대에 학문이 뛰어났던 박승중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시독학사를 지냈다. 박 섬의 6세손 박문오는 정승에 올라 가세를 중흥시켰다. 박대근은 조선시대 인물로 임진왜란 때 적의 정세를 정찰한 공으로 서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왕명으로 도요토미의 사신을 만나 능(陵)을 범한 적을 색출케 하는 등의 공로로 첨지중추부사에 특진된다.

현감 박세렴의 아들 박의장은 문무를 겸비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으로 50여 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의 아우 박홍장은 대구부사로 황 신과 더불어 일본에 사신으로 가 갖은 굴욕을 받으면서도 죽기를 결심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던 현신(賢臣)이었다.

현령 박인호의 아들 박 인은 임진왜란 때 왕을 평양에 호종하여 의주 행재소(行在所)의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다. 숙종 때 시인으로 학명(學名)이 높았던 박창하(형조좌랑 박규의 아들)는 많은 고율시(古律詩)를 남겼다. 박창하의 아들 박 징은 숙종 때 한성부 우윤을 지내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아우 박 호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하여 예학(禮學)을 정립했다. 박백응은 명종조에서 진원현감을 지내다가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 밖의 인물로는 군수를 역임했던 박도욱, 박경행과 학자로 이름난 박정걸이 유명했다.

한글 점자(鮎字)의 창안자인 박두성(朴斗星, 1888~1963)은 맹인들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름은 두현(斗鉉)이며 두성(斗星)은 자이다. 호는 송암(松庵)이다. 경기도 강화 출신인 그는 서울맹아학교 전신인 제생원맹아부 교사에 취임한 뒤부터 맹인교육에 본격 나섰다. 1920년 한글 점자의 연구에 착수하여 1926년 완성했다. 이 한글 점자는 ‘훈맹정음 (訓盲正音)’이라고 불렸다. 일제의 검인정교과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어독본’을 한글 점자로 간행하여 맹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한몫을 담당했다. 장애자 교육에 거의 관심이 없던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평생을 맹인교육에 전념했으며, 한국 특수교육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다.

박두성은 성경의 점자원판(點字原板)의 제작에도 착수하여 1941년에 신약성서를 완성한데 이어 1957년 성경전서의 점역(點譯)을 완성했다. 그가 점역한 도서는 모두 76종에 이른다. 박두성은 또 서울 정동교회와 인천 내리교회에서 맹인들에게 전도했다.

현대 인물은 박수웅(대일화학공업 대표이사), 박대식(대일화학공업 전무이사), 박종득(대한방직 부회장), 박광섭(현대산업 사장), 박병순(육군소장), 박봉업(월계초등학교장), 박순철(성균관대 교수), 박순함(철학박사, 외국어대교수), 박승재(국회의원, 한양대교수), 박윤식(우성건업사장), 박종길(국회의원), 박종문(동국대교수), 박철재(이학박사, 인하공대학장), 박현각(변호사), 박흥수(이학박사, 성균관대교수), 박희진(한국일보상임고문), 박화복(목포화공대표이사, 대종회회장), 박연록(대림장호텔 대표이사), 박석무(국회의원), 박영한(변호사), 박연철(변호사), 박창규(목포대학장), 박한규(전북대학장), 박의재(충남대교수), 박만상(하와이대교수), 박유광(경제기획원 차관보), 박철환(판사), 박병문(외과의원장), 박재빈(정훈기업 대표이사), 박시철(화가), 박정재(용문학원 이사장, 한영대표 이사), 박찬구(언주중학교교장), 박병옥(한성프린트팩 대표이사), 박병록(서예가), 박재만(건양공업 대표이사), 박천재(전남도의회 부의장), 박종팔(권투선수), 박병윤(서울경제신문 편집국장), 박준규(부사단장), 박동만(한여울강남종합건설 대표이사), 박신일(신우주택건설 대표이사), 박종성(삼미상사 대표이사), 박영화(평화상사 사장), 박경대(대한조화상사사장), 박응락(신흥공업대표이사), 박억종(국민대 도서관장), 박윤서(통일상임감사, 세무사), 박재욱(국제계기 사장), 박종오(우양교역대표이사), 박재옥(동아생명 전무이사), 박상연(유니온여행사이사), 박상배(대전충일여고 교장) 씨 등이 있다. (무순, 전·현직 구분 안 됨)

항렬자는 20世 재(載) 정(廷), 21世 성(聖) 현(賢), 22世 인(仁) 현(鉉), 23世 민(敏) 주(朱), 24世 용(容) 정(楨), 25世 규(奎) 섭(燮), 26世 진(鎭), 27世 순(淳), 28世 식(植), 29世 섭(燮) 형(炯), 30世 재(在)이다.

본관 무안은 전라남도 무안군 일대에 위치한 지명으로 백제 때 물아혜군(勿阿兮郡)이라 불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무안군(務安郡)으로 개칭하였고 함풍(咸豊)·다기(多岐)·해제(海際)·진도(珍島) 등의 영현(領縣)을 관할하였다. 1957년에 면성면이 무안면으로 개칭되고, 1979년 무안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주요파는 장단파, 노성파, 적성파, 음죽파, 양주파, 공주파, 홍산파, 당진파, 연기파 등이다.

무안(務安)은 944년(고려 혜종 1) 물량군(勿良郡)으로 고쳤으며,991(성종 10)에는 다시 무안으로 고치고,1018년(현종 9) 나주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었고, 1391년(공양왕 3)에는 성산극포권농방어사(城山極浦勸農防禦使)를 겸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무안현으로 개편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면천(綿川)·면성(綿城) 등의 별호가 있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목포부(木浦府)를 독립시키고 나머지 지방은 무안군이 되었다. 1983년에 일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에 망운면 운남출장소가 운남면으로 승격하였다. 무안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무안김씨(務安金氏), 무안박씨(務安朴氏), 무안방씨(務安方氏), 무안유씨(務安兪氏), 무안임씨(務安林氏), 무안정씨(務安丁氏) 등이 있다.

집성촌은 전남 일원에 가장 많다. 전남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 전남 해남군 마산면 연구리, 전남 무안군 청계면 일원,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 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전남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전남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보룡리,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성산리, 충남 논산시 상월면 일원, 충남 당진군 당진읍 우두리, 경북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등이다.

전남 무안군 무안읍 고절리에는 시조 무안군(務安君) 박진승 이하 6대 15명의 현조를 모신 경기묘(景基廟)가 있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는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宗宅)이 있다. 이곳은 박의장(1555~1615)의 넷째 아들인 박선(1596~1669)이 백형(伯兄)인 박유(朴諭)를 위하여 1644년경에 건축하였다.

조선시대에 모두 15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분야별로는 문과 22명, 무과 24명, 사마시 72명, 역과 24명, 의과 13명, 음양과 1명, 주학 1명이다.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무안박씨는 1985년에는 총 15,742가구 64,698명, 2000년에는 총 24,746가구 78,81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가구 수는 약 9천 가구가 늘었으며, 인구는 1만4천여 명이 늘었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7,069명, 부산 2,591명, 대구 1,855명, 인천 2,144명, 경기 7,083명, 강원 2,228명, 충북 1,074명, 충남 4,930명, 전북 1,460명, 전남 17,971명, 경북 4,623명, 경남 1,486명, 제주 201명이다. 광주를 포함한 전남 지역에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에는 서울 19,754명, 부산 2,816명, 대구 2,426명, 인천 4,504명, 광주 5,954명, 대전 2,103명, 울산 1,099명, 경기 16,358명, 강원 1,894명, 충북 1,428명, 충남 3,487명, 전북 1,548명, 전남 10,087명, 경북 3,756명, 경남 1,288명, 제주 315명이다. 1985년과 마찬가지로 광주, 전남 지역에 가장 많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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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정복규 프로필

● 전북매일 편집국장, 논설위원

● 익산신문 사장

● 현재 새전북신문 수석 논설위원

● 현재 성씨 전문강사(한국의 성씨를 통한 역사탐구)

 ( 저 서 )

• 한국의 성씨: 성씨를 찾아서

• 한국의 성씨: 1,2권

• 칼럼집: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핸드폰이 세상을 지배한다/ 개성있는 인재를 키워라

• 유머집: 각하 코드를 맞추세요

● 핸드폰: 010- 5162- 8632

● 이메일: jungbok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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