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영양 남씨(英陽南氏)-69,155명
(107)영양 남씨(英陽南氏)-69,155명
  • 정복규
  • 승인 2014.10.19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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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남민(南敏)은 중국 당나라 사람이다. 처음 성과 이름은 김충(金忠)이다. 당나라 현종 때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신라 유린 땅(지금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에 도착했다. 신라왕은 중국 여남에서 왔다하여 남(南)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민(敏)’으로 고쳐 주었다. 그 뒤 영양현을 식읍으로 받아 터를 잡는다.

한편 시조 김충과 함께 일본에 다녀오던 그의 첫째 아들 김석중(金錫中)은 성을 받기 전에 출생했다. 그래서 본래의 성을 따라 영양김씨로 했다. 고려 후기에 시조 김충의 후손 3형제가 3개의 본관으로 갈라진다. ▲첫째 남홍보는 영양 ▲둘째 남군보는 의령 ▲막내 남광보는 고성을 본관으로 삼는다.

역학에 정통한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조선 명종 때 경북 울진 사람이다. 그는 설화 같은 삶을 산 기인으로 풍수. 천문. 복서(卜筮). 상법(相法)의 비결에도 도통했다. 남사고는 한 도인을 만나 비술을 전수 받고 도를 통했다고 전한다. 그는 자신이 남긴 예언서〈격암유록(格菴遺錄)〉에서 16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의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격암은 동양 특히 한국을 중심으로 후천개벽이 벌어지는 이유를 역(易)의 원리가 변하는 것으로 해명하고 그 근본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동학의 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아관파천, 조선 국운의 종말시기, 8.15해방, 남북한 분단, 6.25전쟁 발발과 휴전, 4.19, 5.16혁명, 군사 독재정권 출현 등을 모두 예언하고 있다.

그의 예언의 핵심은 첫째 후천개벽이 반드시 오고, 둘째 하느님이신 상제님께서 직접 이 땅 한반도에 내려오시며, 셋째 이 개벽기에 살기 위해서는 '소울음 소리(태을주)'를 찾아 수도하며 뭇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해인(海印)'을 찾으라는 것이다. 남사고는 <개벽기의 주재자를 백보좌(白寶座)에 앉아 계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내용은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요한계시록 20장 11절에“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남자현(南慈賢.1872-1933)은 전설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그는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서 통정대부를 지낸 남정한의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일찍 한글과 한문을 깨치고 12살에는 소학, 대학까지 마치는 등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다. 19살이 되던 해 그는 아버지의 제자였던 김영주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영주는 안동의 전통적 유학자 집안의 아들이었다. 남자현은 시집살이 5년 만인 1896년 진보면 홍구동 전투에서 의병으로 자원한 남편을 잃는다. 얼마 뒤 유복자 김성삼을 낳았다.

그 뒤 남자현의 삶은 엄청나게 바뀐다.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들은 그는 독립선언문을 각처에 배포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남편의 순국이 사실상 그의 애국심을 키운 것이다. 남자현은 3.1만세 시위 후 만주의 김동삼을 찾아가 그가 참모장으로 있는 서로군정서에 입단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사대부 집안의 며느리이자 의병의 미망인이 그 나이에 무장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만주 항일무장운동 당시 의열활동, 사분오열된 만주지역 무장단체의 통합, 군자금 조달, 여성들의 계몽을 위한 여성단체 조직 등 에 남자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시 만주에는 90여개의 한인 독립운동단체가 활동했다. 이들은 출신지와 사상의 차이로 무력 충돌이 잦았다. 남자현은 금식과 혈서로서 단합을 호소, 1922년 8월 마침내 남만주 17개 단체가 통합을 이룬다. 1931년 국제연맹에서 중.일관계 특별조사단을 만주에 파견했을 때의 일이다.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를 잘라 흰 천에 혈서로 ‘조선독립원’이라고 쓴 뒤 손가락을 동봉해 조사단에 보내어 독립을 호소했다. 1933년 만주 전권대사 부토의 암살을 모의한 것이 발각돼 하얼빈에서 체포된 그는 8월6일부터 14일간의 단식 끝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항상 죽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갖고 다녔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136명이다. 문과 25명, 무과 3명, 사마시 84명, 역과 4명, 의과 14명, 음양과 1명, 율과 2명, 주학 3명이다. 주요파는 ▲녹사공파 ▲중랑장공파가 있다. 항렬자는 26世 수(守), 27世 우(佑), 28世 정(禎), 29世 욱(旭), 30世 장(章), 31世 세(世), 32世 원(元), 33世 규(圭), 34世 영(寧), 35世 정(正), 36世 철(喆), 37世 호(鎬), 38世 영(永), 39世 표(杓), 40世 병(丙), 41世 배(培), 42世 수(銖), 43世 한(漢), 44世 화(和), 45世 걸(杰), 46世 재(在), 47世 용(鎔), 48世 하(河), 49世 영(榮)이다.

본관 영양(英陽)은 경상북도 영양군의 지명이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유린군(有隣郡:寧海)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고은현을 영양군(英陽郡)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영양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진보현(眞寶縣)의 입암면(立巖面)·석보면(石保面)을 병합하여 6개 면이 되었다.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는 영양남씨의 집성촌이다. 이곳은 둔덕진 곳에 있는 들이라고 해서 원두들, 원구 또는 원파(元坡)라고도 했다. 원구1리는 15세기 후기인 성종 때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남준(南晙)이 평해에서 이곳으로 오면서 비롯됐다. 그 뒤 연산군 때 무안박씨의 박양기, 진성이씨의 이선도, 명종 때 대흥백씨의 백인국이 차례로 마을에 입주했다. 그래서 지금도 남씨, 박씨, 백씨의 3성이 이 마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원구2리인 옥금(玉琴) 마을은 안동권씨의 권재덕이 개척했다. 17세기경 서성(徐省)이 유배되어 이 마을 왼쪽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옥녀(玉女)가 거문고 타는 형국이라 하여 옥금이라 명명했다. 윗마을은 안동권씨, 아랫마을은 영양남씨가 살고 있으며 마을 이름은 오산(梧山)이라 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영양남씨는 1985년에는 총 15,146가구 62,763명, 2000년에는 총 21,969가구 69,15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7천여 가구, 7천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0,367명, 부산 4,741명, 대구 8,766명, 인천 959명, 경기 3,365명, 강원 6,319명, 충북 1,424명, 충남 1,406명, 전북 327명, 전남 586명, 경북 21,645명, 경남 2,798명, 제주 58명이다. 경북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었다. 강원도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현재는 서울 11,217명, 부산 5,188명, 대구 11,100명, 인천 2,182명, 광주 112명, 대전 1,189명, 울산 2,889명, 경기 9,423명, 강원 4,438명, 충북 1,573명, 충남 711명, 전북 268명, 전남 256명, 경북 16,618명, 경남 1,896명, 제주 95명이다. 2000년에도 1985년과 마찬가지로 경북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강원도에도 많이 분포되어 있다. 한편 2000년 현재 의령남씨는 150,394명, 고성남씨는 9,98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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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정복규 프로필

● 전북매일 편집국장, 논설위원

● 익산신문 사장

● 현재 새전북신문 수석 논설위원

● 현재 성씨 전문강사(한국의 성씨를 통한 역사탐구)

 ( 저 서 )

• 한국의 성씨: 성씨를 찾아서

• 한국의 성씨: 1,2권

• 칼럼집: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핸드폰이 세상을 지배한다/ 개성있는 인재를 키워라

• 유머집: 각하 코드를 맞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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