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인천 이씨(仁川李氏)-68,628명
(108)인천 이씨(仁川李氏)-68,628명
  • 정복규
  • 승인 2014.10.19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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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허겸(許謙)은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다. 인천이씨는 본래 이씨가 아니라 김씨다.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수로왕의 큰 아들은 김해김씨이고 둘째 아들은 어머니 허태후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된다.

인천이씨는 허씨에서 갈린 성이다. 신라 경덕왕 때 허기(許奇)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당의 현종을 호위한 공으로 황성(皇姓)인 이씨 성을 사성(賜姓)받으면서 이씨가 된 것이다. 이허복성(李許複姓)으로 내려오다가 후손 이허겸 대부터 이씨로 쓰게 된다. 따라서 인천이씨, 김해허씨, 김해김씨는 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명을‘가락종친회’라 한다.

인천이씨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은 허기의 10세손으로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를 지냈다. 그 뒤 인천을 식읍으로 받으면서 후손들이 인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묘소는 인천시 연수동 문학산에 있다.

이자연(李子淵)은 현종 15년 문과에 급제, 평장사에 오르고 딸 셋이 모두 문종비가 된다. 순종, 선종, 숙종 그리고 대각국사 의천이 모두 그의 외손이다. 이자겸(李資謙)도 인종 때 딸 셋이 인종비가 된다. 그는 인종의 장인 지위에서 전권을 행사하다가 세 아들과 함께 숙청당한다.

이자연의 동생 이자상(李子祥)은 벼슬이 사재경에 증직되었다. 아들 이예(李預)는 중서시랑평장사 문현공이며 딸이 선종비 정신현비가 되었다. 손자 이공수(李公壽)는 문장이 뛰어난데다 충성심이 놀라웠으며 벼슬이 문하시중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손 이지저(李之氐)는 문과에 장원하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이지저의 9세손 이문화(李文和)는 문과에 장원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증직된다. 그 아들 6형제가 대신의 지위에서 현달했으며 그 자손이 인천이씨의 대종을 이룬다. 이인로는 고려 신종과 고종 때 우간의대부에 올랐지만 문필로써 더욱 추앙받은 인물이다. 9세손 이장용은 고려 때 여러 관직을 거쳤다. 원나라에 들어가 외교 수완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문장, 경술, 음율에도 달인이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이전수(李全粹) : 문과(文科) 세종21년(1439) 친시 병과(丙科), 이약채(李若采, 1727 丁未生) : 문과(文科) 영조37년(1761) 정시 병과(丙科), 이상운(李尙運, 1734 甲寅生) : 문과(文科) 영조32년(1756) 식년시 병과(丙科), 이성동(李成童, 1734 甲寅生) : 문과(文科) 연산군1년(1495) 별시 병과(丙科), 이관(李灌, 1734 甲寅生) : 문과(文科) 태조2년(1393)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이활(李活, 1734 甲寅生) : 문과(文科) 세종5년(1423)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이효신(李孝信, 1734 甲寅生) : 문과(文科) 세종20년(1438) 식년시 정과(丁科) 등 모두 60명이 있다. 문과 11명, 무과 13명, 사마시 35명, 의과 1명이다.

현대 인물은 이영권(국회의원), 이동호(관세청장), 이양호(내무부차관), 이상주(강원대총장), 이순희(내외방적사장), 이남호(한아기업사장), 이재필(영남일보사장), 이영록(고려대교수), 이상록(부산대교수), 이상구(성균관대대학원장), 이만열(숙명여대교수), 이현기(부산대교수), 이병찬(서울대교수), 이우환(재일본대학교수), 이수훈(경남대교수), 이윤채(유림통상사장), 이창익(동아건설사장), 이수욱(변호사), 이수상(변호사), 이병헌(검사), 이진성(판사), 이재무(일본동경대교수), 이경희(경북도부지사), 이성진(서울대교수), 이주식(전북대교수), 이종은(국민대교수), 이래연(충남대교수), 이영찬(인천대교수), 이근석(미국홈스타대교수), 이윤석(대구효성대교수), 이준석(동아대교수), 이규정(부산여대교수), 이효영(계명대교수), 이상출(안동대교수), 이차옥(성신여대교수), 이용현(경북대교수), 이정빈(서울대교수), 이복희(충남대부속병원장), 이진무(연세대비뇨기과장), 이세철(이외과원장), 이진범(병원장), 이박무(미국홈스타대교수), 이기종(전북대교수), 이창주(조선대교수), 이애희(강원대교수), 이준근(부산공업대교수), 이재윤(전문의), 이승호(해군소장), 이주성(공군소장), 이장희(시인)씨 등이 있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주요파는 ▲장화공파 ▲상서공파 ▲시중공파 ▲문충공파 ▲공도공파 ▲문양공파 ▲쌍명재파 등이다.

본관 인천(仁川)은 본래 백제의 미추홀(彌鄒忽) 또는 매소홀(買召忽)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소성(邵城)으로 개칭하였고, 율진군(栗津郡: 始興)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수주(樹州)에 속하였으며, 숙종 때 경원군(慶源郡), 인종 때 인주(仁州), 1390년(공양왕 2)에 경원부(慶源府)로 계속 승격되었다. 1392년(태조 1) 인주로 환원하였고, 1413년(태종 13)에 인천군(仁川郡)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인천부가 되어 인천군 등 12개 군을 관할했으나, 1896년 도제 실시로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인천의 관할구역이 구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인천항의 신시가지로 축소되었고 구(舊) 인천읍과 부평이 통합되어 부천군(富川郡)이 되었다. 1949년 인천시(仁川市)로 개칭되고 1963년 부천군(副川郡) 작약도를 편입하였으며 1968년부터 구제가 실시되었다.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하였고, 1995년 광역시로 개편되었다.

인천 본관 성씨는 인천김씨(仁川金氏), 인천박씨(仁川朴氏), 인천서씨(仁川徐氏), 인천이씨(仁川李氏), 인천조씨(仁川曺氏), 인천채씨(仁川蔡氏), 인천천씨(仁川千氏), 인천최씨(仁川崔氏) 등이 있다.

집성촌은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전남 장흥군 용산면 접정리, 전남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 전남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 전남 장흥군 관산읍,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충북 보은군 삼승면 달산리, 충남 청양군 대치면 형산리,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대국광역시 북구 연경동, 전남 보성군 회천면 벽교리, 경남 함안군 대산면 대사리,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경남 합천군 쌍백면 하신리, 경남 합천군 쌍백면 운곡리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천이씨는 1985년에는 총 14,605가구 61,045명, 2000년에는 총 21,448가구 68,62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가구 수는 7천여 가구, 인구는 7천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0,539명, 부산 9,633명, 대구 7,226명, 인천 1,280명, 경기 3,802명, 강원 592명, 충북 1,696명, 충남 2,153명, 전북 840명, 전남 8,480명, 경북 2,977명, 경남 11,691명, 제주 136명이다. 부산과 경남 지역에 많이 살고 있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11,405명, 부산 9,974명, 대구 7,349명, 인천 2,786명, 광주 2,700명, 대전 1,833명, 울산 1,966명, 경기 9,055명, 강원 619명, 충북 1,567명, 충남 1,231명, 전북 798명, 전남 3,818명, 경북 3,116명, 경남 10,256명, 제주 155명이다. 1985년과 마찬가지로 부산과 경남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인주이씨(仁州李氏)

-유래

인주(仁州)는 인천(仁川)의 옛이름으로 인천이씨이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주이씨는

1985년에는 총 69가구 307명,

2000년에는 총 100가구 349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인주 이씨의 재실 원인재

원인재(源仁齋)는 인주 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의 사당으로 원래 신기 마을에 있었다.

재실은 팔작지붕 형식의 건축물이고, '원인재'라고 쓴 현판 등이 남아 있다.

 인주 이씨를 왕후나 비, 어머니로 둔 국왕이 일곱이나 돼 인주를 '경원군'이라 높여 불렀고, '7대 어향'이라 했다.

- 원인재(源仁齋)

 인천지하철 1호선 원인재역에서 내리면 바로 만날 수 있는 원인재는 인천 이씨의 중시조(中始祖)인 이허겸의 재실(齋室)이다. 중시조란 기울어진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을, 재실은 묘소에 딸려 있는 전각이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을 말한다. 지금의 원인재는 원래 건물이 택지개발로 철거됨에 따라 이 가문에서 새로 지어 1999년 완공한 것이다. 원인재의 '원인'은 '인주 이씨, 곧 인천 이씨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원인재 등의 한옥과 이허겸의 묘소가 있는데, 묘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들이 꽤 운치 있다. 인주 이씨는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누려 이허겸의 외손녀 3명이 모두 현종의 비(妃)가 됐고,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의 세딸은 모두 문종의 비로 들어갔다. 특히 이자연의 장녀 인예순덕 태후 이씨는 순종·선종·숙종과 함께 불교 천태종의 창시자인 대각국사 의천의 어머니이다.

 

원인재는 인천 지방문화재 제5호(1990년 11월 9일 지정)로 고려 현종 15년 인천 이씨의 시조 이허겸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9세기 초에 건립된 목조건물이다.

-원인재(源仁齋) - 인천이씨 중시조 이허겸의 묘 앞에 세운 재실 탐방 (2013/06/27 현재)

인천 이씨 중시조인 이허겸의 묘 앞에 세운 건물이다. 건물의 명칭을 원인재라고

한 것은 인천이 인천(인주)이씨 각 파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천이씨는

김해허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씨로 알려져 있으며『고려사』에 보면 그의 선조는 신라

때 부터 지금의 인천인 소성현에 살았는데, 신라 사신으로 중국 당나라에 갔다가

천자로 부터 성(姓)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천 이씨가 고려시대 귀족 대열에 낄 수

있게 된 것은 이허겸 때 부터로, 그의 외손녀(사위 김은부의 딸) 3명이 모두 현종의

비(妃)가 되었다. 첫째 외손녀는 원성황후로 덕종과 정종 두 왕을, 둘째 외손녀는

문종을 낳았다. 그 뒤 그의 증손녀(손자 이자연의 딸) 세명 역시 문종의 비로 입궐

하는 등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 까지 7대에 걸쳐 귀족정치의 막강한 파벌을 이루었다.

이는 이허겸의 묘가 연화부수지의 명당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 건물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32대 손과 33대 손의 글을 통해,

조선 순조 7년(1807) 혹은 고종 4년(1835)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본래 위치는

연수구 연수동 적십자 요양원 으로 들어가는 좌측의 신지마을에 있었으나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해체되어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으로 옮겨져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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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정복규 프로필

● 전북매일 편집국장, 논설위원

● 익산신문 사장

● 현재 새전북신문 수석 논설위원

● 현재 성씨 전문강사(한국의 성씨를 통한 역사탐구)

 ( 저 서 )

• 한국의 성씨: 성씨를 찾아서

• 한국의 성씨: 1,2권

• 칼럼집: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핸드폰이 세상을 지배한다/ 개성있는 인재를 키워라

• 유머집: 각하 코드를 맞추세요

● 핸드폰: 010- 5162- 8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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