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의 역할과 처신
2인자의 역할과 처신
  • 정종석 발행인
  • 승인 2014.10.19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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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대표의 정치스타일 안팎

 
“김영삼과 김대중은 정반대의 인간형입니다. 김영삼은 논리적이기 보다는 충동적, 감각적입니다. 반면에 김대중은 논리적이며 노력하는 스타입니다. 치밀하며 중요한 것 뿐 아니라 사소한 것까지 직접 결정합니다. 돈,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방식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예전에 들었던 어느 정치원로의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갑자기 옛 얘기를 끄집어 내는 것은 요즘 정치판이 다시 옛날을 닮아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지난 9월 말 국회 정상화의 분위기는 상도동계였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카운터파트로 동교동계였던 문희상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의 비대위원장이 되면서 무르익었다. 김 대표와 문 위원장은 상도동계-동교동계 출신답게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서도 타협과 협상을 줄곧 강조했다. 이들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월호특별법 협상의 타결을 이끌어 낸 장본인들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최근 중국 출장중 개헌의 불가피성을 강조한 지 하룻 만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과하면서 발언을 번복했다. 필자는 김 대표가 개헌론을 꺼냈다가 거둬들인 배경과 앞으로 개헌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 지보다도 김대표가 어찌 그렇게 YS를 꼭 빼닮았나 하는 생각에 잠겼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정치를 지켜보면서 취재한 인맥들의 스타일이 지금에 와서도 ‘판박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 대표가 YS의 문하생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는 상도동계 비서로 정치에 입문해서 청와대 비서관-내무차관을 거쳐서 총선에 입후보, 이제는 5선의 관록을 지닌 명실 공히 이 나라의 거물 중진 정치인이다.  그런 그가 개헌의 불가피성을 언급했다가 정치권에 파문이 크게 일자 하루 만에 불찰이었다면서 이를 거둬들인 것이다. 그동안 정치권을 향해 개헌논의 중단을 요구했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죄송하다고 하면서 애써 사과까지 했다. 오랜 정치 경력의 김 대표가 개헌 발언이 갖는 휘발성과 파괴력을 의식하지 못했을 리 없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대표가 대통령에게 사과하면서 한발 물러선 것도 개헌론의 불은 붙여놓고 대통령과의 대립은 피하는 이른바 치고 빠지는 '전술적 후퇴‘가 아니겠냐는 분석을 내놓는다. 이번 개헌론 파동은 여야를 통틀어 현재 대선후보 지지율 1~2위를 다투는 김 대표의 대권 가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최대 화두인 개헌론을 선점해 정국의 중심을 본인 쪽으로 확실하게 끌어오겠다는 특유의 노림수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YS로부터 정치를 배운 그는 선이 굵고 화통한 스타일이다. “한국 정치에서 권력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라고 믿는 그는 대표 자리도 친박계의 견제를 물리치고 자기 힘으로 거머쥐었다. 과거 한국 야당을 양김씨가 양분하던 시절부터 DJ가 오래 생각하고 진중한 결정을 내렸다면, YS는 빠르게 직관적인 결정을 내리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YS는 “정치에는 흐름과 시대적 요청을 파악하는 ‘동물적인 감각’이 필요하다”면서 직관적인 결정을 많이 내렸다. 여기서 말하는 YS의 동물적인 감각과 직관성을 김 대표가 많이 물려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직관’이란 쉽게 말하면 ‘딱 한 번 보고 동물적인 감각에 의해 단번에 ‘하느냐’ ‘마느냐’를 판단하는 안목‘이다. 따라서 그 속성이 대단히 주관적이고 비논리적이다. 이 직관이 정치와 합체된다면 어떻게 될까. 순기능만 발휘한다면 ‘승부수’가 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는 오히려 파멸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현실 정치에 있어서 무턱대고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바로 이 직관이다. 바로 ‘정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정확한 공식이 있거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법칙이란게 없는 분야다. 또 적자생존의 원리가 강하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현실에서는 직관이 오히려 논리보다 더 먹힌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YS는 직관으로써 지난 1993년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김무성 대표도 직관력이 강한 정치인이다. 아울러 동물적 감각까지 스승인 YS로부터 터득했다. 상해에서의 개헌론 발언은 다분히 상도동식 동물감각에서 나왔음직 하다. 일단 ‘치고 나간 뒤’ 잘 되면 좋고, 안되면 번복해서 수습하는 이른바 YS스타일이다. YS는 야당시절은 물론 대통령 재직 때도 바로 이 ‘국면전환’의 명수였다. 개헌론은 이런 노하우를 평생 배운 김 대표가 날린 동물적 감각의 한번 ‘띄우는 수’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개헌론 발언 하루 만에 말을 바꾼 것도 일종의 YS스타일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야당 지도자들이 잘못한 것은 웬만하면 언론에서 눈을 감아줬다. YS는 유신체제와 80년대 권위주의 시대를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일관했다. 이러다보니 의원직 박탈과, 가택 연금을 당하는 시련을 만났다. 하지만 그때마다 굴하지 않았다. 1983년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 그리고 12대 총선에서 야당 돌풍 또 1987년 6월 민중항쟁을 주도하면서 DJ와 더불어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몸이 상하지 않을까’ ‘이런다고 될까’하는 우려같은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아예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야당이나 야당지도자가 총칼로 무장한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고, 당사도 제대로 얻을 수 없고, 또 최루탄을 마셔가면서 대통령직선제 개헌투쟁을 할라치면 에러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야당 출입기자들이 대충 야당지도자와 동지가 돼서 대여 투쟁노선에 맞장구를 치며 생활했던 시절이었다. 특히 YS는 꼼꼼하고 이성적인 DJ와는 달리 친화력과 인간미가 주무기인 정치인었다. 김 대표는 이 점도 YS를 꼭 빼닮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점이다. 김 대표가 하루 만에 개헌발언을 바꾼 것은 150여석 거대 여당을 이끄는 당대표로선 경솔하기 짝이 없는 처신이다. 그는 '실수'라고 했지만 정치권의 누구도 이 해명을 이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5선 의원에 당정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그런 그가 미리 ‘비(非)보도 요청(오프 더 레코드)’도 하지 않은 채 수십 명의 기자 들 앞에서 개헌얘기를 꺼낸 것은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치고 빠지기'라는 등 온갖 억측과 해석이 쏟아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의 눈높이가 YS가 집권했던 20년 전 보다 엄청나게 높아졌다는 사실을 김 대표는 알아야 한다. 거물 중진 정치이라면 한마디 말에 신중을 기하고 파장을 고려해야 한다. 아무 사안이나 불쑥 말한 뒤 아니라고 덮고 지나가는 태도야 말로 ‘아니면 말고’식 구태정치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집권당 대표가 스스로 감당하지도 못할 발언으로 혼선을 부추기고 갈등만 키운다면 대권주자로서 자질 또는 함량미달이라는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 대표의 2인자로서의 처신이다. 집권당 대표라면 사실상 이 정권의 2인자 또는 후계군이나 다름이 없는 까닭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권력자는 자신을 넘보는 2인자를 싫어한다. 아니 그대로 두지 않았다. 1인자로선 2인자가 자칫하면 딴 맘을 먹지 않을까 불안감을 갖기에 보통 2인자라 지칭되는 사람의 말로는 비참한 것이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박정희 정권 아래서 2인자들의 말로가 어떠했는가. 박정희 1인 절대권력 밑에 몇몇 권력자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권력을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하다고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나 경호실장이 그런 권력자들이었다. 김종필, 김형욱, 박종규, 이후락, 차지철, 김재규 등등… 이들에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이 허락되었으나 그것은 잠시 지나가는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은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들에게 결코 항구적인 권력을 허락하지 않았다. 항상 2인자들끼리 박치기식 ‘충성경쟁’을 시켰고, 어떤 상황이 되면 여지없이 칼을 뽑아 잠시 허락했던 권력을 회수했다.
 
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이들 중에는 김 대표 체제 출범으로 이미 징후를 보이던 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기정사실화됐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청와대가 과거처럼 의회권력의 일사불란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권력누수를 가져온다고 설명한다. 김 대표도 나름대로 고민에 빠져 있을 듯 하다. 막상 원하는 당권을 손에 넣었지만 그 시점이 너무 이르다. 박 대통령 임기 개시 1년 4개월 만에 당대표에 선출된 까닭이다. 그러나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권능은 누가 뭐래도 막강하다. 현역 대통령이 직접 후계자를 지명할 수는 없지만 후계자 결정과정에서 치명적인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잘되게는 못해도, 재를 뿌릴 수는 있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지난 10년 인연을 '애증병존(ambivalence)'의 관계라고 한다. 두 사람이 ‘2인3각’으로 10년을 함께 걸어왔다. 그러나 김 대표는 정치를 야당이란 벌판에서 저돌적인 YS 스타일로 배웠다. 일종의 전통적인 ‘마초(macho/동물의 수컷) 스타일’이다. 반면 박 대통령의 2인자론은 ‘은인자중’이다.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미래권력이 전면에 나서면 현재권력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원칙적으로 2선(결정적인 때는 반대정책을 폈지만)을 고집했다. 사실상의 2인자였지만  몸조심을 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정치스타일이 다르고, 2인자로서의 처신도 상반된다. 그런데 김 대표가 YS스타일로 거칠게 밀어붙인다면 앞으로 당청관계에서 마찰음이 발생할 소지가 훨씬 커진다.
 
다시 역사를 되돌아 보자.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도 한때는 2인자였다. 뛰어난 리더십과 자질을 갖췄지만 1인자 궁예에게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왕건은 2인자 역할에 충실했다. 민심을 얻으며 서서히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리곤 마침내 후삼국 시대 최후의 승자가 됐다. 2인자로서 닦은 기반을 발판으로 1인자 자리에 오른 것이다.
 
정치판에서 ‘성공한 2인자‘는 사실은 그리 많지 않다. 2인자들은 대부분 말로가 좋지 않았다. 정도전이 그렇다. 그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명실상부한 2인자 자리에 올랐다. 새 왕조의 밑그림을 그리고 기틀을 다져나갔다. 하지만 곧 벽에 부닥친다. 그의 신권주의 구상이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이방원과 충돌한 것이다. 정도전은 결국 이방원에게 목숨을 잃게 된다. 정도전의 이상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무성 대표가 진실로 대권에 뜻이 있다면 그럴 수록 발톱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 여기서 도광양회(韜光養晦)의 고사를 되새기면 어떨까. 빛을 감추고 밖에 비치지 않도록 한 뒤,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약자가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 힘을 갈고 닦을 때 많이 인용된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의 식객 노릇을 할 때 살아 남기 위해 일부러 몸을 낮추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하여 경계심을 풀도록 만들었던 계책이다. 또 제갈 량(諸葛亮)이 천하 삼분지계(三分之計)를 써서 유비로 하여금 촉(蜀)을 취한 다음 힘을 기르도록 하여 위(魏)·오(吳)와 균형을 꾀하게 한 전략 역시 도광양회 전략이다.
 
덩샤오핑은 1934년 반주류이던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면서 대장정에 참여해 참모로 성장했다. 1949년에는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을 지휘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덕으로 국무원 부총리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미움을 사게 된다. 마오는 그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혁명의 순수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

덩샤오핑은 여러 차례 실각과 복귀를 거듭하는 시련을 겪게 된다. 덩샤오핑은 쓰러지지 않았다. 1977년 마오쩌둥 사망 후 재기한 뒤 화궈펑(華國鋒)과의 권력투쟁 끝에 1978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다. 마오쩌둥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한편 개혁·개방정책을 밀어붙였다. 비로소 마오쩌둥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부도옹(不倒翁)'이다. 이 때 덩샤오핑이 구사한 것이 바로 몸을 굽히는 도광양회의 전략이다.

이제 국정 2인자로서 김 대표의 역할과 처신은 그 자신에게 달렸다. YS식 ‘마초스타일 정치’를 할 것인 지 아니면 덩샤오핑식 ‘도광양회 정치’를 할 것인 지는 전적으로 스스로의 선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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