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로 온 '유동성 함정'
현실로 온 '유동성 함정'
  • 정종석 발행인
  • 승인 2014.11.0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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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정책은 중앙은행 고유권한..한은 스스로 위상 찾아야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종종 함정에 빠진다. 함정에 빠지면 거기서 헤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곤경을 겪다가도 이를 극복하고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인생살이다. 흥미로운 것은 돈이 종종 함정에 빠지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함정에 빠진 돈, 그것이 이른바 ‘유동성의 함정(Liquidity trap)’이다.

유동성의 함정이란 경제 주체들이 돈을 움켜쥐고 시장에 내놓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즉 시장에 현금이 흘러 넘쳐 구하기 쉬운데도 기업의 생산, 투자와 가계의 소비가 늘지 않는다. 경기가 나아지지 않고 마치 경제가 함정(trap)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상태라는 뜻이다. 이 함정에 빠지면 금리를 아무리 낮춰도 투자나 소비 등 실물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금리를 내리거나 재정지출을 늘려서 유동성을 공급하는 정책을 취해도 경기가 부양되지 않는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때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처음 사용했다. 아무리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은 것을 두고 통화정책이 함정에 빠진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경기부양책을 취하는 정부는 금리를 일정 수준 이하로 내리고 시중에 돈을 많이 풀어 유동성을 공급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소비를 늘리고, 기업은 낮은 금리로 자금을 차입해 투자를 늘릴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이자율이 매우 낮으면 사람들은 가까운 장래에 이자율이 다시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따라서 현금으로 보유하려는 성향이 강해지고, 기업은 경기가 나빠질 것을 우려해서 생산을 줄이고 투자를 미루게 된다. 그 결과 중앙은행이 경기부양을 위하여 유동성을 공급하여도 화폐가 돌지 않고, 개인이나 기업의 수중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실물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미국이 최근 ‘미지의 영역(unchartered territory)’으로 여겨졌던 양적 완화정책(quantitative easing)을 끝내기로 했다. 미국 경기가 나아져서 비정상적인 ‘돈풀기 잔치’를 마감한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聯準)가 양적완화 종료를 선언한 것은 지난 2012년 9월 3차 양적완화가 시작된 지 25개월 만이다. 1차 양적완화가 시작된 2008년 11월부터 계산하면 6년 가까운 기간에 모두 4조 달러 이상이 시중에 풀렸다. 다만 연준은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0∼0.25%)으로 운용하는 초저금리 기조를 ‘상당 기간(for a considerable time)’ 이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시장에선 이르면 내년 상반기 중으로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을 예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우리나라다. 후속 금리인상의 시기와 속도에 따라 국내 경제가 ‘후폭풍’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경기부양을 위해 초저금리 정책을 선택한 우리 정부와 한국은행의 고민이 깊어간다. 미국과 금리 격차가 벌어지면 외국 자본의 급격한 유출 등 혼란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흥국과의 금리 격차가 좁혀진다.그러면 외국 자본이 신흥국 시장에서 철수할 가능성이 크다. 금리 인상 폭과 속도가 빠를수록 자금 이탈도 급격히 일어난다. 외국 자본이 급격히 빠져나가면 신흥국 경제는 또 다시 휘청거릴 수 밖에 없다.
 
현재 우리 정부는 경기부양에 모든 정책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재정적자를 늘려서라도 경제를 살리는 데 투자해야 한다”고 언급할 정도로 정부의 경기부양 의지는 강력하다. 한은도 정부 시책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2%로 낮췄다. 또 추가적인 금리 인하를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금리인상 신호를 켬에 따라 만일 한은이 금리를 낮추면 금리격차 축소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밖에 없다. 이른바 ‘금리의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고 금리를 올리자니 저금리를 등에 업고 빚을 늘린 가계의 막대한 이자부담이 문제다. 늘릴대로 늘린 가계부채의 뇌관이 경제를 짓누를 우려가 크다. 우리나라 경제는 이제 금리를 올려도 내려도 부담스러운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셈이다.
 
정부는 그동안 “한국경제는 다른 신흥국과 차별화됐다”며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가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는 못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혀 왔다. 지난달 말 외환보유액은 3644억1000만 달러를 기록했고 31개월째 흑자행진을 이어온 경상수지 등을 근거로 경제의 기초체력이 탄탄하다는 게 낙관적인 전망의 근거다. 하지만 신흥국 시장이 줄줄이 무너질 경우 우리의 수출길이 막힌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경제도 온전할 수 없다. 한국의 전체 수출 중 신흥국 비중은 중국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만 쳐도 40%를 넘는다. 남미 등 대상지역을 넓히면 70% 수준이나 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기부양을 위해서 사상 최저 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금리인하 효과다. 금리를 많이 낮춰는데도 소비와 투자가 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당장은 부양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가계부채 증가, 이자소득 감소, 자본유출 가능성으로 경제 전반은 구조적으로 더 취약해질 것이라고 분석한다. 내수 부양의 효과는 제한적인데 가계부채 증가, 달러유출 가능성 확대 등 부정적 효과가 커져서 장기적으로 이익보다 손실이 더 클 것이라는 지적이다.
 
필자는 우리 정부가 지금 솔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 경제는 돈을 아무리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다는 것을 시인할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최경환노믹스는 취지를 공감하지만 부동산을 활용한 내수경기 부양정책은 효과 면에서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그련 면에서 정부가 통화당국인 한은에게 계속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라고 한다면 이는 매우 우스꽝스럽고 곤란한 일이다.
 
유동성함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19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을 든다. 당시 일본은 오랫동안 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유지하는 저금리 정책을 폈으나 소비 진작이나 기업의 투자로 연결되지 않았다. 통화량 증가분은 금융권 안에서만 맴도는 상태가 지속됐다. 그래서 지금의 통화확대 정책이 자칫 ‘잃어버린 20년’을 겪어야 했던 일본의 전철을 답습할 지 모른다는 주장이 많다. 일본은 경기침체를 재정확대로 해결하자 주식, 부동산 등 소위 자산시장에 거품이 생겼으며 이는 추후 거품 붕괴로 이어지면서 일본식 장기 불황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지금 정부 정책은 톡 까놓고 말하면 '빚을 내서 집을 사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소득은 늘지 않는데 빚은 많아지니 소비가 줄고, 그래서 내수가 침체됐는데도 되레 빚을 더 내서 집을 사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한국은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앞으로 구조적으로 집값이 꺾이게 돼 있다. 집값이 안정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집을 안 사고 전세를 택하는 추세를 유념해야 한다.
 
물론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한국은행의 고민이 깊을 것이다. 금리인하 등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펴야 한다는 정부 쪽 의견과 압력을 현실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추가로 금리를 낮췄다가는 해외 자금의 이탈세가 커질 수 있고, 가계부채 증가도 우려된다. 이래저래 한은은 ‘안팎 곱사등이’의 신세다. 지난 10월 금통위에서도 한 명의 금통위원은 금리동결 의견을 냈다. ‘유동성 함정’ 등을 이유로 8월에도 나 홀로 동결을 주장한 문우식 위원으로 추정된다.
 
주목할 것은 미심쩍은 금리인하 효과가 중앙은행의 고유 기능인 통화신용정책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의심케 하는 요인이라라는 점이다. ‘최경환노믹스’의 단기적 경기부양책에 한은의 통화신용정책이 끌려다니다가 정작 경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 중앙은행이 제동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다.
 
돈은 경제에 산소를 공급해주는 혈액이다. 돈이 돌지 않아 '돈맥' 경화 현상이 발생하면 한 나라의 경제는 멈춰 설 수 밖에 없다. 돈이 돌지 않으면 각국의 중앙은행은 ‘돈맥’ 경화를 타개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지속적으로 내리고 통화공급을 늘리게 된다. 하지만 금리를 계속 내리다 보면 금리는 어느 순간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수준(일반적으로 금리 0%, 즉 '제로금리'인 경우가 많음)에 이른다. 결국 중앙은행은 쓸 수 있는 모든 정책수단을 상실하게 되고 경제는 유동성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한은이 정부의 단기부양책에 휘둘리면서 ‘호랑이 등에 올라탄’ 꼴이 되고 말았다는 세간의 평가를 지금 냉철히 되새겨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 한은이 결정했던 금리인하는 미국의 통화정책과 반대 방향이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양적 완화를 종료하고 금리정상화 수순에 들어간 만큼 그동안의 금리정책 방향이 잘못됐다면 이를 반성하고 수정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지금이야 말로 한은이 관치금융의 상징이었던 ‘재무부 남대문출장소’ 역할에서 벗어나서 권위있는 중앙은행의 역할과 위상을 스스로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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