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복지의 종말
무상복지의 종말
  • 정종석 발행인
  • 승인 2014.11.16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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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cry for me, Argentina"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난 1914년 아르헨티나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보다 더 부유한 세계 10대 부국(富國)가운데 하나였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이었다. 1920년대에는 세계 5대 경제대국의 지위를 누렸다. 그래서 유럽 이민자들을 흡인하는 '매력적인 자석'으로 불리기도 했다. 소설 ‘엄마 찾아 삼만리’는 가난한 나라 이탈리아 제노바에 사는 마르코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자나라인 아르헨티나로 일하러 간 엄마를 찾아가는 모험 이야기이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 이후 경제의 중심인 유럽 자금이 빠지고, 이후 수입 통제 등 폐쇄적 경제정책을 고집하며 경제가 기울기 시작했다.

필자는 지금부더 24년 전인 지난 1990년 초 남미출장중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본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시가지 전체가 미국과 유럽의 도시 분위기를 합친 것 같은 ‘복합적인 대국’의 인상을 받았다. 수도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울창한 가로수 속 대로는 도로 폭만 해도 우리나라 서울 광화문 네거리보다 훨씬 큰 100여m를 넘을 정도였고, 도심속 오래된 건물의 자태는 과거 농업대국의 위엄과 풍모를 연상케 했다. 다운타운의 교통신호체계 또한 발달해 있었다. 한번 파란 불 신호를 받으면 진행방향으로 파란 불 신호가 이어져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갈 수 있는 선진 시스템이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때 아르헨티나의 경제사정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연 5,000%가 넘는 초(超)인플레이션 속에서 살인적인 물가폭등이 이어졌다. 오죽하면 식료품 가게에서 제일 먼저 사는 사람과 뒤에 사는 사람의 빵 가격에 차이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 정도였다. 1990년대에 아르헨티나는 민영화를 비롯한 소위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물가 인플레이션을 가져온 외환·환율정책 등 반(反)시장적이고 반(反)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쳐 실패했다. 이는 유권자들에게 신(新)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나쁜 오해를 심어줬고 후일 유권자들이 경쟁을 촉진하는 자유화 조치들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최근 아르헨티나는 다시 ‘디폴트’(채무불이행)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벌써 여덟 번째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번 디폴트 위기는 과거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아르헨티나가 세계 자본시장의 말썽꾸러기로 전락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도 칠레나 우루과이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더 낮으며, 세계 자본시장으로부터 골치 아픈 신흥국으로 치부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100년 사이에 가장 이민 가고 싶은 나라에서 세계의 조롱거리로 추락하고 말았다.
 
1946년부터 집권했던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은 배우 출신인 아내 에바 페론의 인기를 등에 업고 노동자 임금 대폭 인상, 산업 국유화 등 강력한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과도한 복지에 따른 재정적자가 심해지자 1970년대부터 고정환율제를 도입했다. 이후 국제사회의 신뢰가 떨어지면서 결국 2001년 외환위기를 맞았다. 이제 군사독재가 끝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불확실성은 경제활동을 위축시킨다. 특히 정치권력이 인플레이션이나 재분배 정책을 실행해 페소화의 화폐적 가치나 여타 사적 재산권을 침해하게 되면 이런 위축효과는 더 확대된다
 
외환위기를 비롯한 수차례 경기 침체에도 아르헨티나는 경제정책을 바꾸지 않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완제품뿐 아니라 모든 부품을 국산화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지난 해 11월에는 내각 일부가 지나친 포퓰리즘에 반발하자 이들을 전부 해임했다. 최근 외환보유액이 급감하며 60년 넘게 유지된 페론주의가 곧 종말을 맞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페론이 남긴 포퓰리즘의 유산이 쉽게 걷히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국민들이 한번 포퓰리즘에 맛을 들이면 아편처럼 그 환각효과와 마성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탓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130명 가운데 80명이 참여한 ‘신혼부부에게 집 한 채를’이라는 이름의 포럼이 지난 주 불쑥 내놓은 주택공급 방안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페론식 포퓰리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포럼은 “공공 임대주택을 100만 채 추가로 늘리고 5∼10년 동안 신혼부부들에게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젊은이들이 주택 마련 부담으로 결혼을 기피하는 문제를 풀기 위한 방안이라는 주장이다.

새정치연합은 당장 내년부터 5만가구(임대주택 3만가구와 전세자금 금융지원 2만가구)를 지원하는 ‘3+2’정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금융지원을 받는 2만가구에 대해 현행 3.3%인 전세자금 대출 이자율을 2~3% 수준으로 낮추고, 여기서 발생하는 이자 차이는 예산으로 보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론의 반응은 냉담 그 자체다. 그렇지 않아도 무상급식 등의 포퓰리즘 공약의 여파로 인한 복지 재정의 고갈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또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실제 국민주택기금의 경우 대출자산이 80조원이 넘기때문에 신혼 주택 공급의 재원조달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또 기초수급자, 고령자 장애인 등 기존의 영구임대주택 대기자만도 4만 7천명인 상황에서, 한정된 재원으로 신혼 부부에게 주택을 우선 공급하는 게 과연 형평성에 맞느냐는 논란도 일고 있다. 한 마디로 새정치연합의 주장은 실효성 없는 또 다른 복지 표퓰리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새정치연합 내에서도, 수십 명의 의원들이 실효성이 없다며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네티즌들은 새정치연합의 '신혼부부 집 한채' 정책을 과거 17대 대선 당시 '신혼부부 1억원' 공약을 내걸었던 허경영 후보에 빗대며 "허경영 공약 베꼈다", "허경영 정당이냐"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허경영 후보는 당시 "결혼하는 신랑, 신부에게 각각 5000만원씩, 총 1억원을 지급하겠다"는 등의 비현실적인 공약을 내걸어 유권자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지금까지 공공 임대주택 건설 물량은 연평균 10만 채 안팎으로 신혼부부들에게 해마다 10만 채씩 주는 일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혹시 실현되더라도 사회적 약자들이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기초수급 대상자나 고령자 장애인 등 영구 임대주택에 입주하려는 기존 대기자는 4만7000명에 이른다. 저소득층 등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한 국민주택기금을 꺼내 쓰겠다는 것도 국민주택기금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
 
공공 임대주택을 새로 100만 채 공급하려면 채당 평균 1억 원을 잡아도 무려 100조 원이 필요하다. 홍 의원은 “공짜, 무상이 아니라 다가구 주택 입주 시 한 달 20만∼30만 원, 소형 아파트 입주 시 50만∼60만 원씩 저렴한 임대료를 받고 제공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이라면 애당초 신혼부부와 부모들의 표심을 노린 ‘과대 포장 신상품’이 아니냐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도 지금 국가채무와 재정적자 문제가 너무도 심각하다. 인구고령화와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국가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2030년에 2000조원에 근접하고, 2060년에는 1경4612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재정적자(관리재정수지)도 올해 25조4000억원 적자에서 10년마다 2, 3배씩 증가해 2060년에는 700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급속한 고령화로 국민연금의 기금 적립금도 빠르게 소진돼 2053년에는 기금이 바닥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가채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비해 낮은 수준이지만 장기적으로 인구고령화 등 인구구조의 변화에 따른 복지지출 증가와 잠재성장률 하락에 따른 세입기반 약화 등으로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 
 
통합재정수지는 2014년 GDP 대비 0.8% 흑자에서 2021년 적자 로 전환될 전망이다. 2060년에는 11.4%로 적자가 확대된다. 국민연금기금은 2038년에 적자로 전환되고 2053년 기금 고갈이 예상됐다. 정부의 2013년 제3차 재정계산결과(2044년 적자전환, 2060년 기금 고갈)와 비교하면 적자전환은 6년, 기금고갈은 7년 빠른 것이다. 총수입에 비해 증가한 세출재원을 국채발행을 통해 조달함으로써 국가채무는 2014년 GDP 대비 37.0%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해 2060 168.9%로 확대된다. 금액으로는 올해 514조원에서 2060년 1경4612조원으로 30배 가량 늘어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중 아르헨티나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 경제에 막대한 수출을 통해 엄청난 무역흑자를 보았다. 군부의 통치와 수출의 호황으로 아르헨티나의 번영과 영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1946년 후안 도밍고 페론이 대통령이 된다. 그의 부인은 에비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에바 페론이다. 그녀는 1945년 페론의 부인이 됐다. 동시에 아르헨티나 국민들과 영원히 결혼함으로써 페론주의의 신화에 공헌했다. 페론주의는 2차 세계대전 중 무역 흑자로 축적된 부를 생산적 의미 없이 그저 시혜적으로 국민들에게 분배했던 인민주의의 한 형태였다. 이런 조치는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일반 사회복지법들을 양산했다.
 
하지만 페론주의는 탄탄한 산업기반을 세우지 못했다. 강력한 정치제도의 육성이나 생산성과 기술력의 향상에도 기여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에 잠재한 엄청난 부는 선동주의와 방종한 정책으로 낭비됐다. 페론주의로는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상당수의 아르헨티나 빈민층이 새롭게 드러났을 때 그들의 욕구를 계속해서 해결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아르헨티나의 역설(the paradox of Argentina)’이다.
 
영국의 권위지인 이코노미스트는 ‘도망가려 하지 마오. 아르헨티나(Don’t try to flee, Argentina)’라고 비꼬았다. 이는 물론 페로니즘을 만들어낸 페론 대통령의 부인 에바 페론의 실화를 담은 뮤지컬 ‘에비타’의 노래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빗댄 말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100년간의 추락’이란 제목으로 아르헨티나의 비극을 다룬 바 있다.
 
사실 경제학자들에게 아르헨티나는 이해하기 힘든 도전이라고 한다. 노벨상 경제학자 수상자인 사이먼 쿠즈네츠는 이 세상의 나라들을 선진국, 후진국, 일본 그리고 아르헨티나로 분류했다. 다른 나라는 일본의 급속한 산업화를 모방했지만 아르헨티나는 유형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큰 전쟁이나 사회주의 혁명과 같은 격변을 겪은 것도 아니지만 100년 동안 추락을 거듭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불황, 1989~1990년 하이퍼인플레이션, 2001년 경제위기를 겪었다. 최근에는 디폴트에 따른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우리나라는 선거 때만 되면 무상복지 공약이 계절풍처럼 판을 친다. 이는 표를 얻으려고 혈안인 여야가 마찬가지다. 새정치연합은 선거 때마다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는 ‘보편적 복지론’에 집착했다. 여당까지 복지경쟁에 가세하면서 지금 우리 정치권은 복지책임을 서로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복지 논란’ 태풍에  휩싸여 있다.
 
새정치연합이 추진 중인 '신혼부부에게 주택을 1채 씩 주자'는 정책은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에 이어 이번에는 무책임한 정치권에서 남발하는 무상 시리즈의 결정판이다. 무상주택 정책이야말로 '한국판 페로니즘'의 부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정치권이 국가 재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퍼주기’식 복지에만 매달린다면 이미 희망을 잃어버린 아르헨티나와 다를게 뭐냐는 비아냥을 들어도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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