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오만-'시장의 경고'
삼성의 오만-'시장의 경고'
  • 정종석 발행인
  • 승인 2014.11.21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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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중공업-엔지니어링 합병 무산..항상 '을의 반란' 가능성

 
요즘 극장가에서는 비정규직 노동 문제를 다룬 영화 ‘카트’의 열기가 뜨겁다. 이 영화는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으로 말미암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량 해고되는 사태가 발생한 실제의 사건이 배경이다.

외환위기로 구제금융을 받을 당시 노동유연성을 높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비정규직은 급증한다. 기업은 당연히 고용과 해고가 손쉬운 비정규직을 선호한다. 구직난에 내몰린 사람들은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비정규직이라도 고마워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고용의 남용과 차별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안방극장에서는 드라마 ‘미생(未生)’의 열풍이 뜨겁다. 100만부가 팔렸다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기존의 지상파에서 볼 수 없었던 내용이다. 샐러리맨들의 일과 직장 생활 전반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미생 효과’로 직장인들에 대한 인식이나 집에서 받는 대접까지 달라지고 있다. 드라마의 배경인 대우빌딩(서울스퀘어)은 드라마 속 주인공의 이름을 붙인 장그래빌딩으로 불린다. 빌딩의 공실율도 낮아지고 건물 내 상가는 주말에도 문을 여는 등 명소로 떠올랐다.
 
미생은 바둑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아직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은 돌의 상태’를 말한다. 주인공은 인턴으로 시작해서 계약직 사원으로 치열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완생(完生)을 향해, 살아남기 위해 한 개의 바둑알이 되어 사투를 벌이는 직장인들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현실의 시청자들은 가슴으로 공감을 한다.
 
이른바 사회 각 분야에서 '을(乙)'의 반란이 무섭다. 그동안 조용히 숨죽이고 살아가던 을들이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직 국회의장이나 검찰총장 등 권력자들의 각종 성추행에도 울분을 참고 숨죽이고 살던 약자들이 이제는 과감히 고소, 고발로 맞대응을 하는 등 '을의 반란'이 이어지고 있다. '갑'들의 전쟁터에 던져진 '을'의 고군분투,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인간 드라마와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우리 사회 도처에 화제를 뿌리고 있다.
 
최근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이 무산됐다.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들이 대거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면서 부담이 커지자 결국 합병을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삼성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리더십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이번 삼성중공업 계열사의 합병 무산은 “삼성이 하면 무엇이든 다 된다”는 삼성의 '갑(甲)' 의식, 즉 오만한 태도에 시장이 경고를 보낸 것이다.
 
삼성그룹은 그동안 '삼성이 하면 (세상의) 기준이 된다'는 식의 과한 자신감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이재용 부회장도 앞으로 삼성그룹을 이끌어 가는 데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게 됐다. 그룹 전체로는 미래의 먹거리 창출이 마땅치 않은 가운데 삼성전자의 실적부진 탈출구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마당에 이재용 체제 들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사업구조 개편에 제동이 걸린 탓이다.
 
이제 삼성은 앞으로 3세 경영권 확보와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시장의 반란’ 또는 '시장의 봉기'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살펴야 할 처지다. 삼성은 이번 합병 무산으로 당장 건설과 중공업의 사업구조 개편에 대한 동력을 잃게 된 것이 뼈아프게 됐다. 중장기적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력을 구축하기 위해 지주회사를 설립할 때도 조심스러운 행보를 할 수 밖에 없다.
 
삼성에버랜드는 사명을 제일모직으로 바꾼 뒤 연내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이 합병하면 다음 순서로 삼성물산 건설부문에 대한 사업구조 재편이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건설부문을 흡수하거나 전자와 금융부문을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들을 아래에 두는 작업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제기됐다.
 
하지만 이번 합병 무산으로 삼성그룹은 기존 방식대로 사업재편을 진행하기 어려워졌다. 사업재편으로 얻을 이익이 없다면 삼성의 시나리오에 얼마든지 제동이 걸린다는 시장의 경고가 나온 까닭이다. 이번 합병 무산은 삼성그룹의 사업구조 재편작업 가운데 최초의 실패사례다. ‘시장은 우리가 추진하는 일에 항상 동의할 것’이라는 삼성식 사고방식에 시장이 일대 경고를 보낸 셈이다.
 
문제는 앞으로 삼성이 하는 일에 시장이 더욱 호락호락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갈수록 시장의 입김이 더 거세질 전망이다. 향후 삼성의 사업재편 작업도 쉽지만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합병 무산으로 주목되는 것은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 방향이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만 놓고 보면 합병실패가 지배구조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두 회사 모두 오너 일가의 지분이 전혀 없는 데다 이들 회사 역시 제일모직이나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핵심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이 앞으로 일을 벌이는데 매우 큰 부담감을 안겨줬다. 주주이익에 반한다고 판단될 경우 기존 주주들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될 수 있는 탓이다. 그동안 진행된 사업재편은 모두 이재용 체제를 준비하기 위한 삼성그룹 차원 마스터플랜의 일부였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앞서 복잡한 지배구조를 단순화하고 향후 지주회사 전환까지 염두에 두고 사전 정지작업을 벌인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번 합병 무산으로 이런 시나리오를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점이다. 삼성그룹의 제일 과제는 그룹에 대한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쪽으로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합병 무산으로 어떤 변화를 추진하든 시장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됐다. 경영권 승계를 조속히 끝내야 하는 삼성으로서는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삼성그룹이 3세로 경영권이 승계되는 과정에서 계열분리를 추진하려고 해도 만만찮은 부담을 안게 됐다. 그동안 재계는 삼성그룹이 분리돼 승계된다면 이재용 부회장이 전자와 금융, 건설 등 핵심 계열사를 받고,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유통과 레저, 서비스 부문을 맡고,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이 패션과 광고 부문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러나 이런 분리를 위해서 회사 분할과 합병을 추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주가치가 훼손된다고 판단할 경우 시장이 그대로 지켜보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삼성이 이재용체제로 옮겨가기 위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사업구조 개편이 좌초됐다는 점에서 이번 합병 무산은 매우 뼈아프다. 삼성전자가 최악의 실적부진에 빠진 상황에서 이를 만회할 탈출구와 새로운 성장동력을 모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실패가 계속 쌓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아직까지 삼성을 이끌 후계자로서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삼성이 추진하는 굵직한 일들이 계속 좌초한다면 이재용 리더십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삼성이 앞으로 사업재편이나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진행할 경우 이제는 주주들의 동의를 먼저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오너인 이재용 부회장 밖에 없다. 앞으로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 지 관심을 모은다. 모든 권위는 처음 한 번 무너지기가 어려울 뿐 일단 한번 흠집이 나면 이를 앞세워 일을 추진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번 합병 무산은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삼성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시장과 국민의 신뢰는 매우 중요하다. 단기적인 경기부양책을 펼치는 현 최경환 경제팀의 문제도 시장이 별로 정부를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책 당국자들의 말이 시장에 별로 먹히지 않는다. 시장 참여자들은 당국자들의 말과 행동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면에 있는 메시지를 찾아 자신들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갑을관계는 계약서 상에서 계약 당사자를 순서대로 지칭하는 법률 용어였던 ‘갑(甲)’과 ‘을(乙)’에서 비롯됐다. 애초 갑을관계는 주종(主從)이나 우열, 높낮이를 구분하는 개념이 아니라 수평적 나열을 의미한 것이었지만 한국에선 상하 또는 주종(主從)관계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과도한 승자독식 문화가 전근대적인 계층의식과 만나 갑의 횡포 현상이 빚어졌다. 급속하게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한국 사회에서 봉건적 가치관과 서구 계약 문화가 혼재하면서 생겨난 부작용이 갑을관계로 나타났다. 계약 당사자는 법적으로 평등하다는 게 서구의 계약 문화지만 실제로는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물질적 불균형이 인격적 불균형으로 이어진다는 게 한국적 갑을관계의 가장 큰 비극이라는 것이다.
 
1997년 터진 IMF 사태 이후 갑을관계가 강화됐다는 주장도 있다. IMF 이후 민주화·정보화의 진전과는 반대로 일부 대기업에 권력이 집중되는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갑을’로 치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갑을관계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장은 대기업의 횡포가 극심한 경제계다. 하지만 ‘갑을관계의 정치학’은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작동한다.
 
자신을 을이라고 생각하는 직장인들 가운데 ‘갑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응답은 매우 많다. 지난 2013년 대기업 상무가 기내에서 여승무원에게 행패를 부리고, 제빵 회사 회장이 호텔 주차 직원의 얼굴을 지갑으로 때리고, 유제품 회사 영업 사원이 대리점 주인을 협박하고 제품을 강매한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갑을관계가 큰 주목을 받았다. 잇달아 갑의 횡포가 공분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한국 언론은 이를 '을의 반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을의 반란이 일어난 이유로는 스마트폰의 등장과 SNS의 확산, 2013년 한국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경제민주화 등이 꼽힌다. 하지만 갑과 을 사이의 권력관계가 역전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과 SNS 발달은 물론 휴대전화로 녹화와 녹취가 언제든지 가능한 시대가 되면서 을이 억울함을 알리는 방법이 다양해졌을 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삼성이 이번 합병무산 사태에서 배우는 교훈은 이제 우리 사회가 시키는 대로 하는 ‘일방적인 상하관계’가 아니라 갑이 을을 존중하고 그들과 같이 가는 ‘갑을 병존의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은 향상 변한다. 그래서 영원한 것은 없다. 이건희 회장도 몇 년 전 건강할 때 “잠시 한 눈을 팔면 삼성도 10년 안에 눈 깜박할 사이에 구멍가게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
 
이번 합병무산 사태로 삼성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장의 실체를 알고, 항상 ‘을의 반란’ 가능성을 깨우친다면 그것 만으로도 이재용 3세 경영체제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큰 수확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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