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이 닥치면 치명적이라는 경고에는 동의하지만, 디플레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크지 않으며 오히려 가계부채 등 당면한 위험요인에 대한 관리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한은의 생각이다. 두 차례 금리 인하 이후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디플레 논란이 다시 화두로 등장했다.
불씨를 지핀 것은 국책 연구기관인 KDI다. KDI는 지난 25일 정책세미나에서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트가 0.7%인 등 소비자물가상승률(CPI)보다 낮다면서 GDP디플레이트를 고려할 때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실제 디플레를 의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KDI는 또 물가상승률이 장기간 1%대에 머무는 것도 한은 등의 분석처럼 공급측 요인이 아니라 총수요 부족의 영향이 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준금리가 2%로 역사상 최저치이지만, 물가상승률 등을 감안한 실질금리는 오히려 2012년 이후 상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한은이 지난 1990년대 일본과 같이 소극적인 통화정책에 머무를 것인 아니라 추가 금리 인하 등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KDI의 주장이다.
그러나 한은의 핵심 관계자들은 KDI의 주장은 과도한 주문이라고 반박했다.우선 KDI가 주장하는 것만큼 우리나라가 인플레로 돌입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지난 1990년대 일본 상황과 우리나라의 최근 경제 상황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인 1990년대 초반 성장률이 급락했고, 1990년대 초반부터 GDP갭 마이너스가 장기간 지속하면서 1990년대 중반 디플레로 진입했다"며 "우리나라는 지난 2012년부터 GDP갭이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올해부터는 갭이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경제가 좋다고 보는 시각은 많지 않지만, 과거 일본처럼 침체 상태도 아니다"며 "올해 3% 중반, 내년 3% 중후반 성장이 대체적인 컨센서스인데, 성장 속도가 좋지는 않지만 디플레를 초래할 수 있는 장기 침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실질금리가 상승한 만큼 추가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는 KDI의 주장도 반박했다.
그는 "실질금리는 기대인플레를 바탕으로 산출해야 한다"며 "기대인플레는 2% 후반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은 만큼 KDI 주장처럼 실질금리가 상승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이어 "KDI도 기대인플레를 감안한 사전적 의미의 실질금리가 중요하다면서도, 실질금리 계산은 물가상승률로 구하기도 했다"며 분석 방법을 꼬집기도 했다.
한은이 수요측면 물가 하락 압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KDI도 최근 각 기관의 성장률 전망치의 오차는 축소됐다고 했는데, 이는 곧 수요측면의 압력은 제대로 짚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최근 통화정책은 물가뿐만 아니라 경기, 금융안정까지 다 고려해야 한다"며 "물가만 보고 통화정책을 하라는 것은 교과서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은의 다른 관계자도 "디플레가 치명적이라는 지적은 인정하지만, 한은은 내년 물가가 2%를 넘어설 것으로 보는 등 적어도 향후 2~3년간은 디플레가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관계자는 "희박한 가능성을 보고 이에 대응하는 통화정책을 취하라는 것은 당첨될 가능성이 있으니 로또를 사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디플레는 가능성이 낮은 위험요인이지만 가계부채 등은 당면한 위험요인이다"며 "당면한 위험요인이 우선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