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과 KDI
한국은행과 KDI
  • 정종석 발행인
  • 승인 2014.11.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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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I가 기재부 '대리전'해서는 곤란

 
우리나라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닥쳐오기 직전인 지난 1997년 4월, 중앙은행인 한국은행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한차례 금리논쟁으로 맞붙었던 일이 있다.

당시 차동세 KDI 원장이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통화공급을 대폭 늘려 금리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규모에 비춰 통화공급량이 적은 편이며, 통화공급을 확대해도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추가적인 물가압력이 없이 총통화증가율을 지금보다 3%포인트 가량 더 높일 수 있으며, 이렇게 할 경우 3년 만기 회사채 수익률을 기준으로 당시 12%대인 시중 실세금리가 1년 안에 3% 포인트 떨어져 한자리 수로 낮아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런 방안이 전해지자 통화신용정책의 주무기관인 한은이 발끈했다. “국책연구기관이 통화와 금리의 관계를 왜곡하는 무책임한 발언”이라는 분위기였다. 한은은 통화량 확대가 금리를 내리기는 커녕 금리를 오히려 상승시킬 것이라고 반박했다. 차원장과 입장과 정반대인 셈이었다. 금리는 대체로 성장률과 물가상승률, 금융중개비용 등을 더한 수준에서 결정된다..그래서 금리를 내리면 물가상승률을 낮춰야 한다..이를 위해서 통화량을 일정한 한도 안에서 운용해야 한다는 것이 한은의 논리구조였다.
 
이 때 한은의 적극적인 반격에 차동세 원장의 주장은 별로 먹혀들지 못하고 만다. 한은과 KDI 간에는 해묵은 ‘티격태격’ 논쟁이 많다. 외환위기 이전에도 대립한 적이 적지 않았다. 외환위기 후 재정경제원 장관이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내놓고 한은총재가 의장을 맡는 식으로 한은법이 개정된 다음에도 한은과 KDI 간에는 의견 충돌이 있었다. 한은은 금리나 통화 말고도 환율 등 각종 통화신용정책의 주무 기관이다. 정부내 기획재정부 등 경제부처가 금리나 환율정책에 관여하고 싶어도 한은의 동의나 결정을 거쳐야만 가능하도록 돼있는 까닭이다.
 
이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엄청난 외환위기를 겪었고, 정권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지금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정도로 경제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최근 한은과 KDI가 다시 금리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 인물이 바뀌었어도 두 기관 간의 대립이 여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올해 한은의 두 차례 금리 인하 이후 잦아들었던 ‘디플레이션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국책 연구기관인 KDI가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언급하며 “금리 인하로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고, 이에 통화정책 당국인 한은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며 날을 세웠다. 한은은 중앙은행이자 통화정책의 최고 기관이다. 반면 KDI는 국내 최고의 국책연구기관으로 꼽힌다. 두 기관에는 국내외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적인 연구기관 근무경력을 가진 쟁쟁한 학벌의 인재와 두뇌집단이 많이 있고, 국내 경제에 미치는 이들의 파워와 영향력 또한 대단하다.
 
이번 금리논쟁에 불씨를 먼저 지핀 것은 KDI다. KDI는 최근 정책세미나에서 지난 해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트가 0.7%인 등 소비자물가상승률(CPI)보다 낮다면서 GDP디플레이트를 고려할 때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실제 디플레를 의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물가상승률이 장기간 1%대에 머무는 것도 한은 등의 분석처럼 공급측 요인이 아니라 총수요 부족의 영향이 클 수 있다고 지적했다.이어 기준금리가 2%로 역사상 최저치이지만, 물가상승률 등을 감안한 실질금리는 오히려 2012년 이후 상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한은이 지난 1990년대 일본과 같이 소극적인 통화정책에 머무를 것인 아니라 추가 금리 인하 등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KDI의 주장이다.
 
KDI가 우리나라의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언급하며 통화정책적 대응을 주문한 데 대해 한은이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한은은 KDI의 주장에 대해 '로또 사라는 것처럼 위험한 논리'라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디플레이션이 닥치면 치명적이라는 경고에는 동의하지만, 디플레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크지 않으며 오히려 가계부채 등 당면한 위험요인에 대한 관리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한은의 생각이다. 지난 1990년대 일본 상황과 우리나라의 최근 경제 상황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두 기관의 주장 가운데 누가 옳은 지를 판단할 직접적인 능력이 없다. 다만 양측의 해묵은 대립이 현재 경제위기의 해소와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혹시라도 정치적 판단에 의해서 이런 논쟁이 발단이 됐다면 더욱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 디플레이션 우려가 제기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KDI의 보고서는 어느 때보다 파장이 컸다. KDI가 정부의 예산으로 운용되는 국책 연구기관이라는 점 때문이다. 기획재정부와 KDI 모두 "사전 교감은 없었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전문가나 시장 참가자들은 별로 없는 편이다.
 
보고서 발표 시기도 의문이다. 정부와 한국은행 등 정책 당국은 최근 '디플레'라는 단어를 사실상 금기시해왔다. 당국이 나서서 디플레 가능성을 언급하다 보면 경제주체들의 심리가 급속히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왔기 때문이다. 기재부 핵심 당국자는 "KDI는 독립적인 연구기관으로 기재부가 KDI의 연구에 전혀 관여치 않는다"며 "KDI의 의견과 기재부의 진단ㆍ전망 등은 별개의 것이다"고 말했다. KDI의 디플레 보고서가 막 기사화된 시점이었다. KDI 관계자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용역을 주는 연구보고서가 아니면 따로 사전에 보고서 내용을 공유하는 일은 거의 없다"며 디플레 보고서 역시 독자적인 연구 보고서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KDI는 국책 연구기관이다. 정부의 예산으로 운용되는 연구기관으로 민간 연구기관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KDI는 정부의 정책 방향을 같이 고민하는 브레인 역할을 맡는 곳이라 정부와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정부 당국자들은 최근 들어 디플레 가능성을 경고하는 지적에 상당히 예민한 반응을 보여왔다. 이런 상황에서 국책 연구기관인 KDI가 정부와 사전 교감 없이 디플레 보고서를 냈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민감한 시점에 KDI가 디플레 가능성을 경고한 보고서를 내게 된 근본적 이유는 한국은행 통화정책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이다.
 
KDI 관계자들은 한은의 통화정책 방향이 지나치게 미온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리나라 경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또 물가안정을 1순위 정책목표로 내세운 한은이 저물가 기조를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나 다름없다는 비난도 나왔다. KDI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가 올해 하반기에만 두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인하했지만, 실질금리를 고려하면 완화적인 방향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디플레를 막으려면 기준금리 추가 인하를 포함한 더 강력한 통화완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이 지난 1990년대 공급측 요인만 내세우며 손을 놓고 있다가 결국 디플레 국면에 진입한 것은 사실이다. KDI는 한은이 공급측 요인을 이유로 저물가 기조를 방치하고 있는데 불만이다. 한은은 일본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금 가계부채가 심각한 국면에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한은이 디플레 방지 차원에서 기준금리를 추가로 내릴 경우 앞으로 뒷감당을 어떻게 할 지 솔직히 걱정이다.
 
금리인하 덕에 쉽게 대출을 받은 사람들이 그 돈으로 집을 사는 대신 빚을 갚거나, 생활자금으로 쓰고 있다. 미국이 양적 완화정책을 끝내고 이르면 내년중 기준금리를 올릴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시차를 두고 자동적으로 우리나라에도 금리인상 압력이 커지게 될 것이다. 한은으로서는 무작정 금리를 내릴 수도 올릴 수도 없는 일종의 '금리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다.
 
이번 논란을 일으킨 KDI의 디플레 보고서는 정부로부터 사전 승인을 받았거나 적어도 ‘묵시적 동의’ 아래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 KDI는 국책연구기관인 만큼 정부부처와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그래서 기재부와 KDI가 ‘짜고치는 고스톱’ 속에 이번 보고서를 내놓은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최경환 부총리가 원하는 정책방향을 KDI가 보도자료로 발표하고 ‘대리전’을 수행했다는 추론이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나라 최고의 국책연구기관인 KDI가 이번 일로 권위가 품격이 추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준경 KDI 원장이 작년 5월 취임한 이후 KDI는 보고서를 통해 정부를 향해 쓴소리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60여명 박사들의 보고서를 모두 읽고 회의 때마다 박사들에게 ‘정책 제안을 더욱 강화하라’는 김 원장의 리더십이 상당한 바탕이 됐다는 전언이다. 오히려 특정 부처의 정책방향을 놓고서는 한은총재가 김 원장과 같은 소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한은과 KDI가 비슷한 시기에 청년 고용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었다. 한은은 작년 12월 ‘청년층 고용 현황 및 시사점’으로, KDI는 지난달 ‘청년취업 활성화를 위한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보고서를 냈다. 청년 고용 확대가 정부 일자리 정책의 주요 과제로 부각된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책연구기관인 KDI와, 국내 최대 조사인력을 보유한 것은 물론 중앙은행으로서 정부와 민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혜안을 제시할 수 있는 한은이 어떤 내용을 발표할 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한은 보고서는 알맹이가 빠진 모습이었다. 청년 고용의 현황은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했지만 정작 중요한 대안 제시에서는 청년층에 대한 근로소득장려세제 도입, 서비스산업의 규제 완화, 정규직에 대한 지나친 보호 완화 및 비정규직 보호 강화 등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해결책을 몇가지 나열하는 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면 KDI는 보고서를 통해 현 정부의 청년 일자리 정책에 대한 문제점과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심지어 “정부의 직접적 일자리 창출 혜택이 정책적 배려가 필요한 청년층이나 경력단절 여성이 아닌 장년층에게 대부분 돌아가고 있어 정부의 직접적 일자리사업에 편중된 재원 배분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정부 정책을 강도 높게 지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금리, 통화와 같은 통화신용정책은 한국은행이 수립하고 집행한다. 한은은 정부부처나 KDI에서 금리, 통화정책에 대한 민감한 발언을 할 때마다 반발하고 나선다. 통화정책은 한은 금융통화위의 몫이며 물가안정을 가장 핵심적인 목표로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기재부 등 정부 당국자들의 중앙은행에 대한 평소의 지론은 한은과는 다른 것 같다. 통화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금융통화위가 한국은행 산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기관으로서 한국은행 위에 있어야 하며, 금융통화위가 바로 중앙은행 그 자체라는 인식이다.
 
이는 현재 한국은행을 중앙은행으로 하고 그 산하에 금융통화위원회를 두는 현 체제의 상식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자동적으로 한은의 엄청난 반발을 일으킨다. 이번 KDI와 한은의 금리논쟁은 현 단계에선 더 이상 확전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러나 경제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금리나 통화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정책당국이 개입하고 싶은 욕망과 유혹이 더욱 커질 수 있다. 헌법과 법률이 정한 대로 중앙은행과 금융통화위의 권능과 존재이유를 인정하고, 정부부처나 KDI는 한은에 협조하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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