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인사야!”-
“바보야, 문제는 인사야!”-
  • 정종석 발행인
  • 승인 2014.12.0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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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에 대한 불만과 소외감..국정 난맥상 초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번 권력을 손에 쥔 권력자들은 주위에서 견제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고인 물은 언젠가는 썩고 마는 법-. 그래서 권력이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선왕조 시대에는 정도전 같은 개국공신들이 설계한 대로 일단 유교이념과 정치권력이 같이 가도록 했다.

조선시대는 왕권이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절묘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갖춘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왕조이면서도 일종의 민주적 시스템이 구축된 나라였다. 중국의 천자 개념으로 하늘을 대신한 왕이 있고, 그 밑으론 사대부라고 하는 하나의 정치전문가 계급이 존재한다. 사대부들 사이에서 과거 제도를 통해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이들이 정책을 맡아보는 구조다.
 
사대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상당히 발달했다. 모든 대신들이 다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상소(上疏)라는 형식으로 올릴 수 있었다. 그 의견이 정부의 핵심적이고도 중요한 것들을 건드린다고 판단하면 상소 하나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이 하루 아침에 ‘잘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야말로 누구나 정책에 대해 발언하고 고발할 수 있는 언로가 개방된 나라였다.
 
또 왕의 권력에 대한 신하들의 통제기능이 활성화돼 있었다. 지금처럼 삼권분립, 이런 개념은 아니지만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라고 해서 왕과 신하들을 견제하는 역할이 굉장히 발달해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조선의 국왕은 삼사-유생-대신들로부터 ‘3중의 견제’를 받으면서 ‘힘들게’ 왕 노룻을 했다.
 
삼정승이라 불리는 대신들은 “이게 도저히 아니다 싶을 때”라는 판단이 들면 끝까지 국왕에게 반대를 한다. 이러면 아무리 왕이라도 자기 맘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 연산군 같이 폭군이라면 이런 시스템을 무시할 수 있었겠지만(결국 반정으로 쫒겨나고 말았다) 이 기본적인 시스템을 존중하는 왕들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세계적으로 봐도 조선왕조의 구조가 생각보다 민주주의가 상당히 발현된 정치시스템이라고 평가를 받는 이유다.
 
모든 일에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했던가. 이런 측면에서 조선왕조 시대에도 ‘말이 많은’ 대간(臺諫)의 인사권을 장악하는 것이 권력을 지키는데 중요한 핵이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권력독주의 비극과 폐해를 막기 위해서 권력 내의 견제와 균형장치를 마련한다. 대간제도를 ‘살아 있는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제도적 장치, 이것이 바로 이조전랑(吏曹銓郞) 제도였다.
 
다른 문관에 대한 인사권은 이조(吏曹)에 있었다. 그러나 이조의 장관인 이조판서가 대간의 인사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다. 따라서 대간의 인사권 만은 이조판서나 이조참판이 아니라 국장 격인 이조전랑에게 주었다. 자연스럽게 정승이나 이조판서측 세력은 이조전랑 자리를 자파가 장악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막기 위해 이조전랑만큼은 자천제(自薦制)를 실시했다. 이조전랑이 다른 자리로 옮길 때 후임 이조전랑을 천거하는 제도였다.
 
이때 가장 유력한 천거 기준은 사론(士論), 즉 선비들의 여론이었다. 만약 권력에 빌붙는 비루한 인물을 천거했을 경우 ‘사론에 저촉되어’ 선비사회에서 매장을 당했다. 말하자면 선비들의 명예를 국가의 청렴을 유지하는 핵심 동력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대간에게는 백관에 대한 탄핵권과 수사권을 주면서, 대간에 대한 인사권은 이조전랑에게 속하도록 했다.
 
이조전랑 인사권은 떠나는 이조전랑이 행사해서 권력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독립시켰던 것이다. 조선왕조 때 우리는 수많은 당쟁과 사화, 그리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외침을 당했다. 이런 숱한 문제점이 있었음에도 500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권력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또한 권력기관을 서로 견제시켰던 국가운용의 지혜에 있었던 것이다. 
 
이조전랑은 원래 한 사람이 아니다. 이조의 정랑(정5품) 3명과 좌랑(정6품) 3명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품계가 그리 높지 않은 5-6품이었다. 그런데도 파워가 셌다. 임금에게 직언을 하는 삼사 관료와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는 바로 이조전랑 자리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1574년(선조 7년) 이조좌랑 오건이 사직하면서 후임에 김효원을 추천했다. 인순왕후(명종의 비)의 남동생이자, 이조참의(정3품)로 있던 심의겸이 반대했으나 전례에 따라 김효원이 그 자리를 맡았다. 마침내 김효원이 자리를 옮길 즈음 심의겸은 동생인 심충겸을 후임자로 천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김효원은 “이조전랑이 외척의 전유물이냐”며 거절했고, 충돌이 시작됐다. 김효원은 한양의 동쪽 건천동(현재 충무로 부근)에, 심의겸은 서쪽 정릉방(현재 서울시의회 부근)에 살았다. 그래서 김효원 세력을 동인(東人), 심의겸 세력을 서인(西人)으로 부르게 됐다. 조선후기 300년 붕당정치의 시작이다. 나중에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더 쪼개진다.
 
나중에 영조가 내놓은 탕평책은 이조전랑의 삼사 추천권을 폐지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초기에는 노론을 중용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붕당의 폐해를 깨닫고 개혁에 나선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 화해를 권유하고 이조전랑의 인사권을 폐지해 자신이 직접 행사했다.이조전랑이라는 중급 관리에게 인사권을 맡긴 것은 고관대작과 외척의 인사 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제도는 사람을 넘지 못하는 법이다. 이조전랑에게 사람들이 줄을 대고 이조전랑은 인사권을 남용함으로써 조선왕국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다.
 
박근혜 정권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정윤회씨의 국정개입 의혹이 문건유출 파문과 권력암투설 등을 거쳐 이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개입 의혹으로까지 번지면서 그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있다. 현 정부에서 핵심요직에 있던 인사들이 서로 경쟁하듯 폭로전에 나서면서 일명 '정윤회 사태'는 일파만파의 양상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EG회장까지 가세할 조짐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누가 비선이고 누가 실세인 지는 시간이 지나면 드러날 것이다. 검찰이 아무리 수사를 해도 지금 당장은 확실히 알 도리가 없다. 역대 정권에서 판박이처럼 막후 실세 얘기가 나왔을 때 누구인지 당장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정권 말기나 다음 정권이 들어선 뒤에야 막후실세들의 국정농단 사실이나 범죄혐의 사실이 밝혀져서 사법처리를 받은 사실을 우리 국민들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문제는 집권 2년차 정부의 이런 일련의 파문과 파동을 깊숙히 들어가보면 결국 인사문제, 다시 말해 ‘자리싸움’이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유달리 인사문제로 실패와 고통을 많이 겪었다. 검증되지 않은 인물을 발탁해 요직에 기용하려다가 번번이 탈락하는가 하면 해당 인물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인선배경 설명이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 과정에서 공식라인이 아니고 지나치게 비선라인에 의존해서 인사를 하는 바람에 실패가 잦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오늘날 조선시대의 이조전랑에 해당하는 자리는 대통령인사수석비서관이다. 노무현 정부는 진흙 속의 진주를 찾겠다며 인사수석비서관을 뒀지만 ‘코드 인사’ 비판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도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출신)’ 인사 논란을 빚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은 소소한 데까지 직접 챙긴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국왕들이 아니라 이조전랑을 없앤 영조의 통치스타일에 가까울 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떤 사람을 어떻게 기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얼마 전에 새로 신설한 인사혁신처에 삼성그룹 출신이 임명됐다. 공무원 인사혁신에 삼성그룹의 인사 DNA를 이식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그러나 웬만한 사람은 청와대 인사수석비서관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새 인사혁신처장이 민간기업에서처럼 성과를 낼 지에 대해서도 현재로선 회의적이다.
 
만일 인사를 청와대 인사수석비서관실이나 인사혁신처같은 공식 시스템에서 하지 않고,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청와대 ‘문고리권력 3인방’ 또는 외부 비선라인으로부터 오는 명단을 철저한 검증없이 발표한다면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폐쇄적 국정운영 스타일과 비밀주의, 그리고 '수첩인사'를 개선하고, 비선이 아닌 공식 시스템으로 인사방식을 바꿔야 한다. 아울러 대통령이 시시콜콜 모든 인사와 정책을 다 챙기는 ‘만기친람(萬機親覽)’ 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난 1992년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말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했다, 미국 대선에서 넓게 쓰인 어구였다. 이 덕분에 빌 클린턴은 당시 현직 대통령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누르고 승리할 수 있었다. 1991년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업무수행능력 지지도가 90%에 육박했다. 그러나 1년 뒤 64%가 부정적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미국 아칸소주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주지사를 지낸 빌 클린턴에게 ‘카운터 펀치’를 맞고 쓰러졌다.
 
클린턴의 구호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였다. 경제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이 말은 유행어가 되었다. 이것을 한국에 그대로 가져와 사용한 사람들이 정치에서는 득을 많이 보았다.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 기관장까지 표심을 얻었다. 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고도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경제타령으로 정권을 얻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필자는 지금 한국정치가 난마처럼 얽힌 종국에는 대통령의 인사문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후임 국무총리가 검증을 통과하지 못해서 두차례나 낙마한 끝에 이미 사표를 낸 국무총리가 다시 청사에 돌아와 일을 맡고 있다. 제대로 개각을 하고 싶어도 언론검증과 청문회의 높은 벽이 두려워 인사를 마음껏 단행하기도 힘들다. 이제는 문화관광부의 국,과장 인사를 놓고도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네, 마네를 놓고 청와대와 전직 장관이 볼썽사나운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한국현대사에 일찌기 없던 일이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들이 마구잡이로 벌어지고 있다. 이런 일들이 곧 바로 해결되지 않고 지지부진하게 이어진다면 국민들은 피로감과 식상함을 넘어서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저항감마저 느낄 것이다. 해결해야 국정 현안은 산더미같이 쌓여있고, 주변국들은 물론 전 세계가 이 사태를 두 눈을 부릅 뜬 채 지켜보고 있다.
 
박근혜 정권에서 경제가 물론 중요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인사문제다. 취임 초부터 파행을 낳은 개각과  잇달은 인사실패-인사지체에 대한 불만과 불평, 이에 따른 국민들의 피로감과 소외감이 좋지 않은 여론을 낳고, 이것이 다시 국정을 난마처럼 꼬이게 하고 있다. 역대 정권에서 인사가 항상 문제가 돼 왔지만 지금처럼 국정을 ‘이상한 블랙 홀’에 빠져들게 한 적은 없었다.
 
역사는 현대를 사는 우리의 거울이다. 위정자들이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면 실패를 반복하게 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과거 클린턴이 인용해서 정곡을 찔렀지만 지금 우리한테 말하라면 제목을 이렇게 고쳐달아야 하지 않을까. “바보야, 문제는 인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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