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임진왜란,파천(播遷) 애사
징비록-임진왜란,파천(播遷) 애사
  • 정종석 발행인
  • 승인 2015.04.0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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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양반들, 통치 대신 권력유지에만 매달린 처절한 댓가

 
“파천이라니요? 절대로 아니되옵니다!”

임진왜란의 뼈아픈 역사를 그린 KBS 대하 역사드라마 ‘징비록’에서 부산포, 동래 함락 소식이 전해지고, 탄금대 전투에서마저 왜군에 패퇴하자 임금 선조는 파천을 결정한다. 이에 좌의정 서애 류성룡은 선조 임금에게 눈물로 도성 한양을 비우기로 한 결정을 반대한다. 그러나 밀려오는 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선조는 임진강으로 개성으로, 마침내 의주로까지 파천을 한다.
 
파천(播遷)은 임금이 본궁을 떠나 난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몽진(蒙塵)도 파천과 비슷한 뜻이다. 사전적으로는 ‘먼지를 뒤집어 쓰다’라는 뜻이지만 평소처럼 왕의 행차길에 흙먼지를 청소할 여력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행차때 백성들의 원망과 욕을 함께 뒤집어 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파천의 역사는 선조가 처음이 아니다. 고려왕조 몽고의 침략 때 이미 전략적으로 이용해서 이득을 보았다. 과연 파천이 정답인가. 어떤 집단이든 우두머리가 있어야 응집력이 생기고 집단으로서 역할을 한다.그것을 무력화시키는데도 우두머리를 제거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왜군도 마찬가지의 전략을 썼다. 오랜 내전을 겪은 왜군은 이를 알기에 한양으로 곧장 치고 올라왔다.
 
다만 왜국 봉건제 기반의 상식으론 임금이 성을 버리고 도망갈 줄은 몰랐다고 한다. 사무라이 정신에선 임금이나 장수가 자기가 지키던 성을 버리고 도망하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던 탓이다. 임란에 속수무책이었던 선조는 병자호란 때의 인조와 더불어 국난을 막지 못한 어리석고 무능한 조선조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않으려고 한양에 남아 저항했더라면 더 처절히 침략을 당하고 몰살되었을 지도 모른다. 훈련된 병력도 없는 데다 민관이 모두 왜적에 맞서 결사항전을 할 준비나 각오마저 돼있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에도 철저히 각성하지 못한 채 당파싸움을 일삼았다. 징비록을 완성한 지 불과 32년 만에 조선은 또 다시 병자호란의 국치를 당한다. 게다가 이미 9년 전인 1627년에 정묘호란을 당하는 등 충분히 경고를 받았으면서도 대비를 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이후 300년이 지난 19세기 말에는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는다. 그 직전 일어난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의 공모 아래 고종과 왕세자가 궁궐을 벗어나 지금의 서울특별시 정동(貞洞)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간 사건이다. 개화기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조선에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중전 민씨를 학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핑계로 1896년 2월 11일 친러 세력과 러시아 공사의 공모 아래 고종과 왕세자가 궁궐을 벗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갔다. 이를 계기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친일 개화파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가 내각을 장악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해 좌우되었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갔다.
 
이 파천은 기본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의 세력다툼의 결과였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 갔다. 결국 허약한 조정은 열강사이에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잃는 비운을 겪는다. 조선왕조 500년은 왕과 양반들이 통치 대신 권력유지에만 매달린 처절한 댓가로 종말을 맞은 역사의 기록이다.
 
일부 국사학자들이 지금도 "조선은 임진왜란이나 늦어도 병자호란 때 망했어야 했다"는 말이 나온다. 조선은 500년 넘게 왕조를 이어간 세계적으로도 드문 장수 왕조였다. 하지만 백성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편안하게 살게 했느냐는 의미에서 보면 성공적인 왕조는 아니었다. 중국의 왕조는 대체적으로 200~300년간 이어졌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가 망하게 된 원인을 파악하고, 국가를 일신했다.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고 제도개혁을 통해 나라를 혁신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권력이 500여 년 지속되자 혁신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이란 준엄한 평가를 면치 못한다.
 
서울신문 문소영 논설위원이 쓴 ‘못난 조선’을 보면 신성한 노동은 양인과 노비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국가를 경영한다는 이유로 세금부담도 지지 않고, 군역도 기피한 조선 후기의 양반들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강조한 서양 귀족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비교하면 조선의 양반은 얼마나 특권적이고 이기적이었던가. 그는 조선의 쇄국 정책이 아쉬운 것은, 국가 운영에 대한 철학이나 전략이 아니라 제 밥그릇을 지키고자 했던 지배층 정쟁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조선은 초기만 해도 유연했던 사회였으나 치열한 당쟁은 학문적,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다. 주자학 외의 학문은 ‘사문난적’으로 지목되고 다른 해석은 곧바로 이단이 됐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송시열과 노론의 정치적 기반. 당시 통치철학으로 효력을 상실, 중국은 물론 일본도 외면한 주자학에 집착했다. 황당한 것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150년 황금기’의 청나라를 거부해놓고, 1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명백히 쇠락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부터 청나라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세계 정세를 그만큼 못 읽은 것이다.
 
박근혜 정권 출범후 지난 2년 동안 한국정치는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첫 해는 줄곧 '대선불복' 정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더니 지난 해는 온통 세월호 참사로 허송세월을 하고 만 꼴이다. 국리민복을 위한 민생정치는 아예 실종되고 말았다. 조선시대에 명분과 이해에 얽힌 붕당정치와 별로 다를게 없다. 지금 사회의 허리인 중산층이 붕괴된 가운데 서민들은 경제가 IMF시절보다 더 어렵다고 아우성치고 있다. 북한의 급변사태 등 복합적 안보위기가 한반도를 엄습하고 있다. 더 이상 정치가 과거에 매달려 나라 안팎의 위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되는 엄중한 시점이다.
 
임진왜란의 비극을 이 땅에서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마음에서 경계하고 반성하며 해법까지 제시하고자 집필한 것이 바로 징비록이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우리 후손들의 나라는 1590년대 조선과 달라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까닭은 비운의 과거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역사을 보고도 배우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 여야 정치인들부터 주말엔 어설픈 선거운동을 집어치우고 엄숙한 마음으로 징비록을 시청할 것을 충심으로 권한다.
  

<필자 소개>

 
   
 
   정 종 석
 (elton2023@hanmail.net ) 
 
금융소비자뉴스  발행인
세종대/가천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언론학 박사)
한국언론인연합회 임원
(전) 동아TV 대표이사 사장
(전) 서울신문 베이징특파원/경제과학부장/정치부장/편집부국장
 
* 저서 : 언론국제화의 마피아들(공저/나남,1995년)
* 논문 : 디지털 다채널 시대 - 채널브랜드 이미지가 광고효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박사학위, 세종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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