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난다는데...‘품격 빈곤’ 시대
생선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난다는데...‘품격 빈곤’ 시대
  • 김명서
  • 승인 2018.12.1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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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브랜드 홍수...‘품격 상실’ 다반사에 따른 가치 상승 때문

[김명서 칼럼] 소설가 고 이호철 선생(1932~2016)은 ‘품격’을 자주 이야기했다. 분단문학으로 대표되는 선생이 가장 우선시했던 가치는 ‘독재체제’와 대치되는 ‘자유’. 그런데 “자유를 누릴수록 품격 있게 사용해야 하는데 함부로 사용하고 있다”고 언짢아 했다.

2000년대 후반 무렵 우리 사회가 이해집단 간 다툼으로 한창 시끄러웠을 때였던 것 같다. 선생은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춘 신문 인터뷰에서 “품격이 없기 때문”이라는 한마디로 그 원인을 정리했다. 해석이 워낙 간단명료한데다, ‘품격’이 주는 어감에 꽂혀 “맞아! 품격이야”라며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선생의 작품과 인생역정 등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듯싶다.

요즘 들어 ‘품격’이 너무 흔해졌다. ‘여행의 품격’ ‘중년의 품격’ ‘한식의 품격’ 등 방송 프로그램에다 각종 상품에 이르기까지 ‘품격’이라는 말이 넘쳐난다. SBS 수목드라마 ‘황후의 품격’은 20%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품격’이라는 표현에 호감을 느끼고, ‘품격’을 내세운 브랜드가 먹히기 때문일 것이다.

‘품격’ 하면 선생의 그 당시 발언이 생각나 인터넷으로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역시 ‘품격’은 선생에게 단골 메뉴였다. 그러면서 발견한 인상적인 구절. “독일에 가서 느낀 건데, 그 곳에서는 품팔이를 하는 사람들도 수준이 있더라. 인생을 함부로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도 민족 수준이 높다.”

수준이 높다는 것은 품격이 있다는 뜻이다. 품격의 사전적 의미는 ‘품성과 인격’. 여기에 ‘품격이 있다’라고 하면 기품이나 위엄, 품위 등 고상함에 가까운 뜻이 된다. 하지만 선생이 독일과 일본을 지목한 것은, 그 고상함보다는 익히 알려진 그들의 질서의식과 예절바름 때문인 것 같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보편적 생활 방식을 ‘품격 있다’로 본 것이다. 반면 “우리는 지금 자유를 너무 함부로 대해 품격이 없다. 자유를 맘대로 사용하다 보니 무질서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선생의 생각이었다.

상대 배려하고, 폐를 끼치지 않는 기본적 ‘품격 유지’도 어려워해

‘품격’이 매력적인 브랜드로 부각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 ‘품격 빈곤’의 반증일 수 있다. 품격 없는 일이 다반사로 생기다보니, 품격의 가치가 높아졌다는 추정도 무리가 아니다.

본시 ‘품격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해줘야 격에 맞다. 스스로가 하기에는 어색하다. 그리고 아무에게나 ‘품격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적당히 나이도 차고, 적절한 역할도 있고, 비뚤어지지 않고 상식에 맞는 언행을 해야 그 소리를 들을 자격이 생긴다. 어린 소년이 어른처럼 행동하는 걸 ‘품격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출중하지는 않더라도 모나지 않게,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폐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기본적 ‘품격 유지’는 가능하다.

그런데 그게 간단치 않은 모양이다. 그 만큼 세상살이가 각박해지고 치열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한 후배 기자가 칼럼을 통해 ‘충격적’이라며 소개한 현장은 ‘품격 빈곤’의 실상을 실감케 해주었다. 아침 출근길이었다고 한다. 구세군 냄비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서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줄은 구세군 냄비가 아닌 바로 옆 로또 복권 판매점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 구세군 자원봉사자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1등이 여러 번 나왔다’는 복권 판매점을 찾아 줄을 선 사람들이야 잘못이 없다. 다만 썰렁한 구세군 냄비 곁에 줄지어 선 모양새만큼은 그들 스스로도 매우 불편하게 느꼈을 법하다.

그러나 이 정도 상황을 놓고 품격을 얘기하는 것도 어찌 보면 사치다. 그동안 언론에 오르내린 ‘품격 제로’ ‘인간성 부재’의 현장과 사건에 견주어보면 이는 열심히 살려는 소시민들이 엮어낸 부자연스러운 ‘삶의 현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권력의 ‘품격 상실’ 다수 구성원에게 피해주고 국가 품격과 직결

‘품격 상실’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올 들어서도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일탈, 대웅제약 회장의 욕설과 폭언, 양진호 한국미래기술회장의 엽기적 행각 등 ‘가진 자’들의 ‘갑질 횡포’가 잇따라 지탄을 받았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여러 가지 의혹을 둘러싼 다툼은 말할 것도 없다. 사안의 본질도 저속함 그 자체이지만, 고백이나 참회를 생략한 저열한 공방 역시 중증 ‘품격 결핍’에 다름 아니다.

개인 차원이 아닌 정치권력의 ‘품격 상실’은 그 피해가 다수 구성원들에게 미치고, 국가의 품격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청와대 특별감찰반 출신인 검찰 수사관이 청와대를 상대로 펼치는 ‘폭로전’도 여기에 해당한다. 결정적 계기는 “궁지에 몰린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물을 온통 흐리고 있다”는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의 비난이었다.

당사자에겐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적인 대응이다. 이 장면을 마주한 일반 시민들이 느꼈을 뜨악함이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소한의 품격을 지켜가며 엄정하게 대처했더라면 사태가 이 지경으로까지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향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난다고 했던가. 이호철 선생은 “죽더라도 삶의 자국이 품격 있게 남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매 순간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작고한 지 1년이 지난 작년에는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이호철 통일로문학상’이 제정됐다. 올해 제2회 본상 수상자는 팔레스타인 소설가 사하르 칼리파였다. 선생의 품격이 풍겨난다.

<필자 소개>

김명서(clickmouth@hanmail.net)

-전 서울신문 정치부장, 사회부장, 논설위원

-전 서울신문 편집담당 상무

-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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