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풍연의 이슈파이팅] "파워포인트를 없애라". 얼마 전부터 일부 기업에서 특명을 내리고 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할 것 같기도 하다. 말 그대로 파워포인트를 쓰지 말라는 얘기다. 나는 일찍부터 그런 주장을 해왔다. 실제로 강의를 할 때도 PPT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만들 줄도 모른다. 일부러 배우지 않았다.
PPT의 장점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시각적인 효과 등은 거둘 수 있다. 그것 말고는 특히 장점을 꼽기 어렵다. 작성하는 시간에 비해 가성비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PPT를 잘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점점 화려해진다. 내용보다 모양에 치중한다고 할까. 내가 PPT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PPT를 없애려면 최고경영자부터 바뀌어야 한다. 아예 PPT 사용 금지 지시를 내릴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PPT를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쉽다. 시각적으로 보기 좋은데다, 일을 열심히 한 것처럼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각 부서마다 PPT 전담이 있었다. 보여주기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번 계산해 보자. 워드를 사용해 문서를 작성할 경우 1시간이면 될 일을 서너 배 걸린다고 할 때 비용 계산을 해보라. 낭비임에 틀림 없다. 일은 간결해야 한다. 워드로도 충분하다. 구태여 PPT를 만들어 화려하게 치장할 필요가 없다. 국내서 가장 먼저 PPT를 없앤 곳은 현대카드다.
현대카드는 정태영 부회장의 의지가 강했기에 가능했다. 2016년 정 부회장은 '제로 PPT'를 선언했다. 업무만족도 조사에서 직원들이 호소한 고충 셋 중 하나가 'PPT 작성'으로 나온 까닭이었다. 사내 보고용 문서는 PPT 대신 워드와 엑셀로 작성한다. 대외용 문서 작성용으로 부서마다 컴퓨터 한 대만 파워포인트를 깔도록 허용하고 나머지 컴퓨터에선 프로그램을 없앴다.
그럼 시행착오는 없었을까. 정 부회장의 얘기를 직접 들어본다. "처음엔 엑셀로 PPT를 흉내 내는 보고서가 간혹 나왔습니다. PPT를 사용하는 것보다 시간이 드니 더 나쁜 경우였어요. 그래서 1년에 두 번 메모리에 남은 모든 작성물을 감사해서 PPT와 유사한 보고서들을 잡아내고 A·B·C 세 등급으로 나눠 벌칙을 줬습니다. 계몽 기간이 끝난 작년 하반기부터 벌칙 수위를 올렸는데 해당 부서의 복지비를 한 달 또는 두 달간 없애는 방식입니다. 개인을 벌하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고 부서 분위기가 바뀌니까요."
정 부회장은 "사내에서 우리끼리 멋있는 보고서를 돌려 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면서 "한 시간 내용을 고민하고 다섯 시간 PPT 구도와 색깔에 우리 시간을 소모한다면 난센스다. PPT 스킬이 보고 내용을 저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낭비 요인을 제거하겠다는 얘기다.
기업은 실용적이어야 한다. 미국 아마존도 PPT 대신 6쪽짜리 보고서를 쓰도록 하고 있단다. 좋다면 굳이 안쓸 이유가 없다. 시각적 효과나 화려한 언변보다 글을 더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용에 밀리면 퇴장당한다. 지금 PPT가 그런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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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오풍연/poongyeon@naver.com
약력
서울신문 노조위원장,논설위원,제작국장, 법조대기자,문화홍보국장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
대경대 초빙교수
현재 오풍연구소 대표
저서
‘새벽 찬가’ ,‘휴넷 오풍연 이사의 행복일기’ ,‘오풍연처럼’ ,‘새벽을 여는 남자’ ,‘남자의 속마음’ ,‘천천히 걷는 자의 행복’ 등 12권의 에세이집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