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과학에 밝았던 관료의 비운
18세기 과학에 밝았던 관료의 비운
  • 임형택
  • 승인 2019.06.0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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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택 칼럼]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일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일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는 이가환(李家煥)과 정조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떠올려 보고 싶다.

이가환은 정조 치세에서 공조판서를 역임한 고관이었지만 학식과 총명이 대단해서 다산도 경탄해 마지않았던 가히 천재였다. 한국 실학의 종주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자이기도 했다. 정조는 그의 지적 능력을 알아보아 중용하였는데 그 때문에 적대 세력의 질시를 온 몸에 받아서 정조 사후 일어난 신유옥사에 걸려들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신유옥사란 이단 사교를 뿌리 뽑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은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터무니없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기로 말하면 바로 앞서 있었던 일화가 훨씬 더해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실학 군주가 학문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이가환의 박식은 수리 기하와 천문 역상(曆象) 등에도 공부가 깊었다 한다. 정조는 수리와 역상을 종합한 이론서가 꼭 필요하다고 보아 이가환에게 이 방면의 전문 서적을 편찬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임금께 “요즈음 시류가 분별이 없어 수리가 무엇인지 교법(敎法)이 무엇인지 구분을 못 하고 혼동하여 꾸짖고 야단들입니다. 이런 책을 만들다가는 신에게 비방의 소리가 쏟아질 뿐 아니요, 성덕에도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고 아뢰어, 이 일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다산은 이가환의 억울한 죽음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지은 전기적인 글에서 이 일화를 특기하면서 “성상께서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언급을 붙여 놓았다. 실학 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의 태도로 미루어 수리 역상을 다룬 이론서를 편찬해 내겠다는 의지를 접지 않았던 것 같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바로 이듬해 정조는 세상을 떴고 이내 신유옥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다산은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해야 했고 이가환은 참혹하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해서 천재 이가환에게 기껏 시문 약간이 전해질 뿐 깊은 공부가 있었던 수리 역상의 저술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동아시아 한자권이 서양을 만나서 교류가 시작되면서 등장하게 된 말의 하나가 ‘서학’이다. 이때 서학은 서양의 학술과 서양의 종교를 싸잡아서 쓴 표현이었다. 위 이가환의 발언에서 ‘수리’는 학술에 속하는 것이고 ‘교법’은 종교에 속하는 것임을 오늘날에 와서는 분간 못할 사람이 없다. 그야말로 개념 없이 사실 분간도 못 하는 시류 때문에 실학 군주의 안목으로 모처럼 기획한 학문 프로젝트가 첫발도 나가지 못하고 좌초된 것이다.

분별없이 비방과 날조로 야단법석이니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 신앙에 대해 사교라는 이름으로 물리적 폭력을 쓴 당국자의 조처가 부당한 행위였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정치적 반대 당파를 숙청하는 수단으로 이용해서 허위 날조까지 일삼았던 사실은 더더욱 악이었다. 그에 앞서 있었던 편찬 기획이 좌초되고 만 일은 당시 조용히 넘어가긴 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에 못지않게 근본적인 문제점이었다.

수리는 자연의 자재(自在)한 이법이고 역상은 천체 운행을 관측하는 학문이다. 이런 과학 지식은 그 자체로서 추구할 가치가 지대하니 역법은 거기서 도출된 것이었다. 한자권에서도 예로부터 이에 대한 추구가 있어 왔지만 서양 근대에 달성한 수준은 이쪽에 견주어 월등했다. 동서가 열린 초기에는 이 점을 인정하고 접수하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17세기 이래 통용되었던 시헌력(時憲曆)이다. 동양을 압도했던 저 서양의 기술과 무기 또한 과학 기술에서 응용되었던 성과가 아니었던가. 개념 없이 실체적 진실을 무시하고 호도한 문제점은 실로 어처구니없을 뿐 아니라 더없이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이 문제점은 220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과거사로 그치지 않고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도 유사하게 확대 재생산이 되고 있다. 실체적 진실을 무시해 버리고 개념 없이 마구 뱉어내는 언설과 종작없는 막말, 오르내리는 댓글들, 가짜 뉴스들이 지금 얼마나 범람하고 있으며, 문제의 심각성은 어떻게 증폭되어 가고 있는가. 이념적 덧칠을 해대서 사람들을 현혹하는가 하면 당파적 이익에만 몰두해서 세상을 오도시키려고 야단법석이다. 이런 와중에 휩쓸려 민족사의 중대한 과업인 남북문제가 어디로 빠져들지, ‘촛불혁명’ 이후 진행되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망칠지 자못 걱정스럽기도 하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글쓴이 / 임 형 택
· 성균관대 명예교수
· 전 한국한문학회 회장

· 저서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창비, 2014)
〈21세기에 실학을 읽는다〉(한길사, 2014)
〈한문서사의 영토 1,2〉(태학사, 2012)
〈석학 인문 강좌 1~10〉(돌베개, 2010)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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