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pension)제도를 다시 생각한다
연금(pension)제도를 다시 생각한다
  • 전창환
  • 승인 2019.06.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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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환 칼럼] 고령화와 금융화(financialization)가 묘하게 맞물려 서로 상승작용을 하는 가운데, 21세기 초반을 살아가는 지구촌 현대인들은 연금(pension)문제를 자주 접하게 된다.

우리의 경우, 국민연금은 늘 전 국민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직장마다 서구식 기업연금제도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허리띠를 더 졸라매어 개인연금에까지 가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점점 더 그 중요성을 넓혀가는 연금제도는 도대체 어떤 속성과 기원을 갖는 것일까?

연금제도엔 금융논리와 노사관계가 함께 작용

우선 연금제도와 연금산업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 양자가 금융의 영역에서 금융적 논리에 의해서만 작동·진화한다고 보는 표준 재무적 관점 혹은 주류 금융경제학적 관점에서 탈피하는 것이 급선무다. 연금제도는 본질적 성격상 해당 자본주의 국가의 노사관계에서 유래하는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노사관계에 내재하는 고유한 갈등과 모순이 연금제도를 매개로 하여 금융영역으로 옮아 온 것인 이상, 연금 문제를 논의할 때 금융적 논리와 함께 노사관계의 갈등과 모순을 동시에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연금제도나 연금 산업에서는 금융적 논리와 노사관계의 원리가 서로 교차하여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금제도의 금융적 논리와 관련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한 원리는 중세영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탁(trust)의 원리이다. 12세기 영국에서는 유족들에게 토지에 대한 권리를 유언으로 이전할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은 유언을 통해 유족에게 토지재산을 물려주고 싶어 했다.

또한 영국의 영주나 귀족이 전쟁참여 등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예정보다 일찍 미성년자인 후손들에게 재산을 맡기더라도 이들이 미성년이라 그것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영주와 귀족들이 그들 재산을 미성년 유족이 아닌 친구나 지인 등 제3자에게 맡기기 시작하면서 신탁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성인 귀족과 영주가 위탁자가 되고, 미성년 후손들이 수익자가 되는데 이 양자 사이에 미성년 유족을 대신해 그 재산을 관리‧ 운용하는 제3자(수탁자) 관계가 등장한다.

이 관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후손(수익자)들이 재산권(소유권과 운용권)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신탁의 원리 하에서 수익자는 재산에 대한 소유권과 재산운영에 대한 권리를 모두 수탁자인 제3자에게 일임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익자의 지위는 늘 불안정했다. 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익자에게 신탁재산을 향유할 수 있도록 수익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강화하는 조치가 뒤따랐다.

마침내 수탁자와 수익자 간에 소유권의 내용적 분할(즉 수탁자에게는 보통법에 기초한 소유권 부여, 수익자에게는 신탁재산을 향유할 수 있는 형평법상의 소유권 부여)이 이루어지고 양자 간 충돌을 막기 위한 완충장치로 ‘수탁자 의무(fiduciary duty;신임의무)’가 설정되었다. 요컨대 신탁원리의 핵심은 소유권의 분할가능성을 열고 이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수탁자와 수익자 간의 이해상충가능성을 수탁자 의무로 해결하는 것이다.

연기금 운용자의 수탁자 책임 분명치 않아

연금제도가 바로 이 신탁원리에 기초해 있는 이상, 연금가입자(종업원이든 자영업자이든)인 수익자가 연기금 재산의 소유와 운용에 대해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신탁의 본성상, 공사 연금을 막론하고 신탁원리에 기반한 연금제도에서는 수익자이자 연금보험료 납부자인 가입자의 적극적인 권리행사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신탁의 원리는 연금가입자(수익자)로 하여금 연금에 대한 소유권과 통제권을 현저히 약화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 대신 연금운용을 수탁자에게 맡기면서 수탁자 책임이라는 논란이 분분하고 불분명한 책임(충실의무, 주의의무; duty of loyalty and duty of care)이 부과된다. 수탁자의무의 이행여부를 어떻게 판단할지를 둘러싸고 법조계와 경제학계(특히 법경제학)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까지도 수탁자 책임의 실체적 내용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현대재무이론의 ABC로 알려진 분산투자원리가 20세기 말 수탁자책임의 절차적 원리를 떠올랐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고 기이하다.

중세 기원의 신탁 원리가 연금제도와 연금 산업에 미치는 효과는 금융화가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21세기 현재까지 여전히 유효하고 강력하다. 지금까지 신탁 원리의 영향으로 인해 연금가입자(수익자)의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권리행사가 철저하게 제한·억제되어 왔다.

그 결과, 연금가입자는 자본시장의 최고원리인 유동성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었으며 결국 연기금 운용자인 수탁자의 재량에 종속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과연 이 연기금 운용자가 일자리 창출이나 작업장 민주주의와 같은 금융과 이질적인 논리를 얼마나 포용할 수 있을까?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글쓴이 / 전창환
·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 금융경제연구소(사) 연구기획전문위원
· 보건복지부/국민연금기금/성과평가보상위원회 전문위원

· 공·편저
〈현대자본주의의 미래와 조절이론〉 (문원, 1999)
〈미국식자본주의와 사회민주적 대안〉 (당대, 2004)
〈사회민주주의의 경제학〉 (돌베개, 2013)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돌베개, 2016)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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