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탱큐 화법'과 감춰진 손익계산서
트럼프의 '탱큐 화법'과 감춰진 손익계산서
  • 정종석
  • 승인 2019.06.30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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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정의선 일으켜세운 트럼프...'거래의 기술' 속 호출 당한 한국재벌들

[정종석 칼럼] 원래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은 외교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초강수를 띄워 협상을 막다른 상황까지 몰고 가는 수법을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벼랑 끝 전술의 원조로 북한을 꼽았다.

그러나 요즘은 벼랑 끝 전술의 원조가 미국일지 모른다는 느낌이다. 사업가 출신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능란한 비즈니스 협상술로 지난 2월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을 자존심을 꺾은 탓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쓴 자서전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을 보면 그가 마냥 허풍치고 위협하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책에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그의 집념이 잘 드러나 있다. 트럼프는 북한 핵문제에 이어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이끌며 국제경제에 태풍을 몰아오고 있다.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년 만에 다시 국내 대기업을 향해 '땡큐 화법'을 꺼내 들었다. 30일 오전 숙소인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로 미국에 투자한 국내 대기업 총수들을 따로 불러낸 자리에서다. 사실상 대미 추가투자를 독려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우리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국내 대기업 총수들과의 간담회에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직접 거명, 손을 맞잡는 모습을 보인 뒤 "3조6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고 소개했다. 신 회장은 지난달 롯데케미칼의 미국 루이지애나주 에탄크래커공장 준공식 참석차 방미했다가 백악관 초청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했다.

트럼트 대통령의 '땡큐 화법'은 사업가 시절부터 다져진 전형적인 비즈니스 화술

트럼프 대통령은 또 앞자리에 앉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등을 차례로 일으켜 세워 "훌륭한 리더가 자리에 함께 했다"며 "다시 한 번 미국에 투자해준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도 한국 기업들이 투자를 더욱 적극적으로 확대해 달라"고 당부했다.

트럼트 대통령의 '땡큐 화법'은 사업가 시절부터 다져진 전형적인 비즈니스 화술이다. 상대방을 치켜세우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식이다. '어르고 달래고' 하는 식으로 투자를 압박하는 고도의 지능화한 화법인 셈이다.

대통령 당선 직후였던 2017년 1월에도 자신의 트위터에 "땡큐 삼성,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쓰면서 국내 재계에 대미투자 고민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잇따라 미국 현지 가전공장 설립을 발표했다. 재계에서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화려한 찬사' 이면에 주목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재계에서 가장 우려했던 반(反)화웨이 동참 요구는 없었다고 한다. 전날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미중 무역협상 재개 합의가 이뤄지면서 국내 기업들도 한결 짐을 덜게 됐다는 관측이다.

다만 문제는 트럼프가 세계의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 대통령이라 할 지라도 독립 주권국인 우리나라의 재벌총수들은 불러 적극적으로 대미 투자를 하라는 등 이러쿵 저리쿵 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날 회동이 형식상 간담회 초청이지만 전후관계로 보면 미국 대통령이 와서 한국재벌들을 소집, 일장훈시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날 재계 총수들은 간담회 예정 시간보다 2시간 가량 빨리 현장에 도착해 8시30분께부터 한미 경제인 미팅에 참여했다. 호텔 출입은 보안상 이유로 엄격히 통제됐으며, 취재진과 시민들은 정문 앞에 운집했다. 내로라 하는 한국의 재벌총수들이 휴일인 일요일 새벽부터 군사훈련을 받는 느낌이었을 지도 모른다.

공식 행사 오전 10시인데도 韓기업인들에게 8시30분까지 오라고 해 '무례' 논란

취임 전부터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외친 트럼프는 냉정히 따져볼 때 그냥 장사꾼이 아니라 거래를 만들어내는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종의 전략가다. 그는 ‘거래의 기술’ 책에서 “사람이란 가끔 거칠게 나갈 필요가 있을 때 그렇게 해야 한다” “목표를 높게 잡은 뒤 전진 또 전진” “협상장에서 상대방이 갖고 있는 물건이 ‘별거 아니다’는 인식을 주지시켜주는 게 중요하다” 등의 구절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까지 날아와서 직접 재벌총수들을 불러 한명 한명 일으켜 세워가며 대미 투자를 당부한 것을 봐도 그가 얼마나 거래의 기술을 익힌 달인인 지를 잘 알 수 있다. 아울러 철저히 자국이기주의로 무장한 그의 정신세계와 집념에 섬뜩 무서운 생각마저 들 정도다.

이번 회동 후 뒷말’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행사가 당초 간담회 형식으로 예상됐지만, 정작 한국 기업인들은 발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회동 시간이 약 30분에 불과했다. 그것도 트럼프 대통령의 인사말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주한 미국대사관 측이 공식 행사가 오전 10시인데도 ‘한·미 경제인 미팅’이란 명분을 내걸어 한국 기업인들에게 1시간30분 전인 8시30분까지 오라고 통보한 점도 외교 예절상 무례하다.

그렇지 않아도 경기침체로 국내투자마저 망설이던 국내 대기업들은 골치가 아프게 됐다. 미국대통령이 이른 아침부터 '소집'한 간담회에서 호명까지 당해가면서 투자를 부탁받았는데 모른채 할 수도 없고 난감한 분위기라고 한다.

화웨이 사태에 따른 압박이 없어 안도했지만, 대미 투자라는 숙제가 남았다는 반응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 기업들을 단체로 소집, 간담회까지 진행한 만큼 기업 입장에서는 투자에 대한 부담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대기업들은 전반적인 경영여건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대미투자 여력이 얼마나 있을지 계산기를 두드려도 뾰족한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이 무슨 자격과 권한으로 한국에 와서 재벌들을 멋대로 소집, 호령하며 자기 나라를 위해서 돈을 쓰라고 하는지, 이런 사태가 정상인지 씁쓸하기만 하다.

<필자 소개>

정 종 석 (elton2023@naver.com)

서울이코노미뉴스 대표기자

한국언론학회 회원(언론학박사)

(전)세종대/가천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전) 동아TV 대표이사 사장

(전) 서울신문 베이징특파원/경제과학부장/정치부장/편집부국장/광고마케팅국장

* 저서 : 언론국제화의 마피아들(공저/나남,1995년)

* 논문 : 디지털 다채널 시대 - 채널브랜드 이미지가 광고효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박사학위, 세종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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