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영혼이 없다?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
  • 이도선
  • 승인 2019.11.1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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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선 칼럼] 엊그제 정통 경제 관료 출신의 회고록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 말이 회고록이지 실상은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산 역사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시장으로의 귀환 없이는 한국 경제의 장래가 없다”고 역설하며 “시장이 실종된 이 시대의 나라 경제”에 강한 경고음을 보냈다. 내로라하는 왕년의 경제 관료들이 대거 참석한 기념회의 북 콘서트에서는 경제가 이렇게 무너지도록 정치권에 끽소리도 못한 경제 관료들을 질타하는 소리도 나왔다.

우리 경제는 지금 수출, 투자, 소비, 고용, 재정, 부동산 등 거의 모든 분야가 빈사 상태이거나 극도의 혼돈에 빠져 있다. 정부가 ‘소득 주도 성장’이란 해괴망측한 이론을 들고나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근무제 강행, 비정규직 해소 같은 친(親)노동 일변도 정책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결과다. 한마디로 경제 무지렁이들이 국가 경제를 온통 이념으로 물들이는 바람에 시장경제의 입지가 크게 위축됐다는 얘기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아예 사회주의식 계획경제로 대체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하긴 문재인 정권 들어 탈난 곳이 비단 경제만이 아니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안보와 외교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 사방에 원군은 없고 적군만 널려 있고, 사회는 극심한 진영 싸움에 휘말려 가뜩이나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가 또 동강나게 생겼다. 한류가 영화, 음악, 드라마 등 대중문화는 물론이고 첨단기술, 의료, 음식, 패션 등 숱한 분야에서 세계를 휩쓰는 나라에서 있을 법이나 한 일인가. 한때 좌파가 선동용 구호로 열심히 우려먹던 ‘헬조선’이 정작 좌파 정권에서 현실화하는 것은 꽤 역설적이다.

나라가 이 지경까지 추락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관료들의 보신주의도 한몫 단단히 했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요즈음 정부가 아무리 잘못된 정책을 내놔도 바른말로 제동을 거는 참다운 관료가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이른바 소득주도성장론이 경제를 망치든 말든, 탈(脫)원전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과 함께 좋은 일자리들을 날리든 말든, 무분별한 태양광 발전으로 환경 오염이 극심해지든 말든, 남북 군사합의서로 1000만 인구의 수도 서울이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놓이든 말든, 대한민국이 아무나 흔들어도 되는 나라로 전락하든 말든 오로지 ‘나는 모르쇠’다.

30대 초반의 청와대 행정관(별정직 5급)이 부른다고 50만 대군을 지휘하는 육군참모총장이 인사 자료를 들고 청와대나 국방부도 아닌 카페로 쪼르르 달려간 것도 결코 정상은 아니다. 차관급인 청와대 안보2차장이 외교부 장관을 윽박지르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대대장(중령)이 국방장관이나 사단장 등의 보고 체계를 건너뛴 채 북한 선원 강제 북송건을 안보1차장에게 직보하는 등 공직사회의 기강은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며 외려 큰소리치는 공직자들을 보면 기가 찬다. 그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도 나라의 근간을 흔들 소지가 엿보이는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는 자리를 걸고라도 할 말은 하는 관료가 적지 않았다. 지금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그런 정통 관료들의 열정과 헌신이 크게 기여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넘쳐나는 사람만 빼곤 별다른 자원도 없고 국토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 이들 관료가 민간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번듯한 나라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탄핵 조사 절차에 돌입한 의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리한 내용을 잇따라 폭로하는 미국의 전·현직 공무원과 군인들은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대통령이든 누구든 특정 권력이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는 관행이 공직사회에 확립된 덕분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자칫 임기를 못 마치고 중도 낙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이 세계 최대 강국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것도 이 같은 공직사회의 저력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을 게다.

이제 우리 공무원들도 과감히 떨쳐나설 때가 됐다. 전문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정권이 임명한 장차관과 등의 고위 정무직도 자조와 멸시의 의미가 동시에 깃든 ‘영혼이 없다’는 표현에 더없는 자괴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국민을 기만하고 국익을 해치는 권력의 오만에 맞선 양심선언이 겨우 신재민 전 사무관과 김태우 전 수사관 뿐이라면 100만 공무원사회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영혼 있는 공무원들’이 앞다퉈 나서야 한다.

#이 칼럼은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의 '선사연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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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도선 ( yds29100@gmail.com )

언론인,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 편집위원, 운영위원
(전) 백석대학교 초빙교수
(전) 연합뉴스 동북아센터 상무이사

(전) 연합뉴스 논설실장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워싱턴특파원(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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