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창예산의 종말...16세기 말 스페인과 2020 한국정부 예산
팽창예산의 종말...16세기 말 스페인과 2020 한국정부 예산
  • 권의종
  • 승인 2019.11.1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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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예산, 연례행사로 늘리다 보면, 국가 재정 급속도 악화...누굴 위해 부풀려지고 있나

[권의종 칼럼]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 최초의 제국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남아메리카 대부분과 북아메리카의 3분의 1, 필리핀 등을 지배했다. 펠리페 2세 때 최대의 황금기를 맞는다. 하지만 과도한 팽창 정책으로 큰 규모의 재정 적자가 쌓여갔다. 여러 차례 국가 부도를 겪다 몰락하고 말았다. 군사력보다 경제력에서 먼저 균형이 깨졌다.

펠리페 2세는 선대로부터 광대한 영토와 함께 막대한 빚을 물려받았다. 국고 수입이 모두 저당 잡혀 등극 다음 해인 1557년 파산을 선언한다. 그런데도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은 멈출 줄 몰랐다. 정치적 야망에 사로잡혀 전쟁을 치르는 바람에 전비 수요가 급증했다. 차입 과정에서 국유지와 광산 대부분이 상인 수중에 넘어갔다. 1560년 다시 채무불이행 사태에 이른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발발로 군사비 지출은 더 늘어났다. 재정 수입의 두 배를 넘었다. 위험을 감지한 채권자들이 이자를 40%까지 올렸다. 1575년 다시 파산 위기를 맞게 된다. 1576년에는 병사들에게 지급할 급료만도 국가 수입의 2.3배에 달했다. 부채는 갚을 길이 막막했다. 식민지로부터 엄청난 양의 귀금속이 유입되었으나, 군사비 증가로 인한 국고 파탄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1596년 또 국가 파산을 선포한다. 

1598년 펠리페 2세가 서거할 무렵, 거의 모든 세입원이 저당 잡힌 상태였다. 신대륙으로부터의 예상 세입을 담보로 빌린 돈으로 겨우 국가 재정을 꾸려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 후로도 국가 채무는 늘어만 갔다. 이자율도 높아져 정부 수입의 70%가 이자로 나갔다. 1667년 차입금은 정부 소득 10년 치에 달했다. 연이은 국가 부도를 반복하며 스페인은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멀어졌다. 세입보다 세출이 많은 재정 적자가 무적함대 스페인 제국을 무너뜨린 것이다.

재정 적자 앞에서 거대 제국 몰락도 속수무책...재정 확대 필요성 크나, 예산 확대 신중해야

역사의 쓰라림 때문일까. 전통적으로 적절한 재정 정책은 예산 수지의 균형 유지를 의미해왔다. 이런 믿음은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깨지게 된다. J. M. 케인스는 경기를 안정시키기 위해 재정 정책을 활용할 것을 주문했다. 정부는 급격한 경기 변동을 막는 데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새 이론을 펼쳤다.

예산은 경제 활동 수준이 낮을 때에는 적자여야 하고, 높은 인플레이션을 수반할 만큼 경기가 과열된 경우에는 흑자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재정 정책은 정부가 직접 상품이나 노동력의 구매자로 등장, 국민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확실하고 강력함에 따라 여러 나라에서 널리 활용돼왔다. 다만, 예산 편성이나 국회 심의 과정이 필요해 적기 시행이 어려운 게 흠이다.

성장 동력이 약해지고 경기 침체가 지속되는 작금의 우리 경제로서는 재정 정책의 긴요성이 절실하다. 확대 재정을 위한 예산 증액이 불가피하다. 정부 지출을 늘려 경기 확장 효과를 가져와야 할 당위성과 긴급성이 충분하다. 부문별 적정 소요 예산을 산출, 국회와 국민 앞에 제시하고 설득시키는 게 정부가 취할 급선무일 수 있다.

이 와중에 청와대 대변인의 발언이 뜬금없다. "곳간에 있는 작물들은 계속 쌓아두라고 있는 게 아니다. 쌓아두기만 하면 썩어버리기 마련이기 때문에 어려울 때 쓰라고 곳간에 재정을 비축해두는 것"이라는 설명을 내놨다. 적절치 못한 비유다. 가뜩이나 세수가 줄어 국채 발행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가 재정을 부패 농산물에 비하다니. 얼토당토않다. 공감은커녕 공분을 참기 어렵다.

올 예산도 다 못 쓰면서 내년 예산 큰 폭 증액...국회도 부풀리기 경쟁 “제 돈이면 과연그 럴까?”

정부나 국회가 하는 행동에 영 믿음이 안 간다. 정부의 확대 재정 기세가 등등하다. 정책 실현의 핵심은 예산이라는 논리를 편다. 513조 5000억원의 사상 최고액의 내년도 예산안을 편성했다. 국회는 한술 더 뜬다. 예산심사 과정에서 삭감은커녕 되레 부풀리기 경쟁 양상이다. 여야 할 것 없이 지역 건설사업, 현금복지 등의 예산 확보에 혈안이다. 돈 나올 구석은 누구도 생각지 않는 듯하다.

올해 남은 예산을 소진하라는 독촉이 성화같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을 국회로 불러 재정 집행을 독려하고 나섰다. 조기 소진하는 지자체에는 인센티브 제공까지 약속했다. 올해 본예산 기준 중앙정부가 직접 쓸 수 있는 금액은 299조원이고, 지방정부가 230조원, 시·도교육청이 75조원을 써야 한다. 10월 말 기준 중앙정부는 올해 예산의 85%를 쓰는 데 그쳤다. 지방정부는 70%, 시·도교육청은 77.3% 밖에 못 쓰고 있다.

올해 469조 6000억원의 본예산과 5조 8000억원의 추경도 다 못 쓰면서 내년 예산을 대폭 증액시키려는 게 앞뒤가 안 맞는 행실이다. 추경이 늦어져 경제 회생이 더디다고 아우성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남은 돈 다 쓰고 결과까지 보고하라니.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예산을 마구 늘려 마음껏 써보려는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다. 자기 돈이라도 그럴까?

예산 팽창은 늘 신중해야 한다. 세출이 세입을 초과하면 그만큼 빚을 더 얻어 와야 한다. 국채 발행이나 한은 차입을 늘려야 한다. 그 빚은 다음 세대가 갚아야 한다. 빚을 물려받는 처지에서는 억울할 노릇이다. 제 살기도 힘겨운 데 동의한 적도 없는 앞 세대의 빚까지 떠맡아야 한다. 개인 빚은 안 갚아도 될 수 있으나, 나랏빚은 그러지도 못한다. 예산을 연례행사로 늘리다 보면 국가 재정은 급속도로 악화되게 마련이다. 16세기 말 스페인 꼴 날 수 있다.

필자 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논설실장
- 부설 금융소비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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