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5년’, 분단구조가 ‘광복’일 수 없다
‘광복 75년’, 분단구조가 ‘광복’일 수 없다
  • 이만열
  • 승인 2020.08.2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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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칼럼]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1930년 3월 1일,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언제 다가올지 모를 해방을 이렇게 노래했다. 요즘 이 시를 자주 읊으면서 선진들이 갈구했던 그 광복된 한반도를 그려본다. 지금도 1945년 8월 해방을 맞던 때, 마치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듯, 해방의 날을 감격해하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시골 신사마당에 모여 신사를 불태우고 환호작약하던 그 모습은 회상하는 내 가슴이 오히려 터질 듯하다.

도적 같이 이른 해방, 준비없는 지도자들

『백범일지』에는, 더덩실 춤추며 맞았던 민초들과는 달리,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해방에 당황해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백범은 1945년 8월 초, 광복군의 훈련광경을 보기 위해 시안(西安)을 찾아 광복군의 마지막 훈련을 참관, 만족했다. 이들은 곧 미국 잠수함 등으로 한반도에 밀파, 각종 공작을 수행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달 10일 밤 백범은 산시성(陝西省) 주석 축소주(祝紹周)의 초청연에서 “왜적이 항복한다”는 충칭(重慶) 발 소식을 듣는다. 백범에게는 일제패망이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준비한 참전준비가 허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백범만큼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분이 없었지만, 일본의 항복은 그를 당황하게 했다. 준비가 없었기 때문일까.

임시정부는 27년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 ‘건국강령’을 다듬고 다당제와 정당정치(以黨治國)를 실시하고 의회, 정부, 군대를 두고 근대국가를 실험했다. 1943년에는 장개석(蔣介石)을 통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외교도 펼쳤지만, 막상 일본이 항복했을 때를 대비하지는 못했다.

미군의 임정반대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은 그 단적인 예다. 해방 전후하여 여운형의 건국동맹과 건준이 있었지만, 미군 주둔에 맥없이 무너졌다. 그런 상황에서 여운형, 김규식의 중도노선이 이승만, 김구의 우파와 박헌영 등의 좌파를 포용하여 분단극복의 중심세력이 될 수는 없었다.

분단의 구조화, 이것이 독립운동이 꿈꾸었던 광복인가.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곧 좌우갈등과 테러가 빈번했다. 그 연장 선상에서 70년 전 6.25가 터졌고, 동족상잔에 외국군까지 참여, 오늘의 분단구조를 만들었다. 남북이 서로를 향해 증오심을 심화·확대 할수록 더 대접받는 기이한 구조 속에서, 적대의식은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적대적공생관계’를 강화할수록 친일청산은 힘이 빠진다.

해방 직후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 속지 말고, 일본놈 일어난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오늘의 현실로 구체화될 줄은 몰랐다. 소련이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 미·일은 우리의 독립과는 길항관계에 있다. 해방 후 1년 수개월을 제외하고는 미군이 전작권을 쥐고 있는데도 그런 상황을 ‘광복 75년’이라 말한다. 이젠 주둔군 비용도 떠맡으라고 강박한다. 이게 선열들이 꿈꾸었던 광복인가.

‘광복 75년’, 분단구조로 절름발이된 광복을 언제까지 물려줘야 하나. 이게 독립투사들이 지향했던 광복이 아니라면, 남북은 역사 앞에 정직하게 자기검열을 해야 한다. 핵과 외군철수, 남북군축을 한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한다. 코로나 사태로 세계대전 못지않게 큰 변혁이 예상된다. 이 기회에 병력, 화력이 밀집되어 있는 한반도를 평화, 협력 지대로 전환시켜 ‘완전자주통일독립’의 ‘광복’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세계평화로 가는 길이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글쓴이 / 이 만 열
· 숙명여대 명예교수
· 사학자(전 국사편찬위원장)

· 저서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2014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지식산업사, 2010
〈역사의 중심은 나다〉 현암사, 2007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푸른역사, 2007
〈역사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한국기독교의료사〉아카넷, 2003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단채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문학과지성사, 1990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 두레시대, 1998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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