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도장(圖章)’ 문화...사라져야 할 ‘눈도장’ 문화
사라지는 ‘도장(圖章)’ 문화...사라져야 할 ‘눈도장’ 문화
  • 권의종
  • 승인 2020.10.1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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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장 없애기’ 행정개혁 시도...스가 내각 출범과 함께 ‘도장과의 전쟁’ 선포
기업인이 있어야 할 곳은 사업장...우리는 ‘눈도장과의 전쟁’으로 사회개혁 나서야

[권의종 칼럼] 일본이 ‘전쟁 중’이다. 스가 요시히데(管義偉) 내각이 출범과 함께 개혁의 첫 작업으로 ‘도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규제개혁 담당상이 행정기관 공문서에 도장을 사용치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업무상 꼭 도장이 필요할 경우 이유를 적어 보고하라 명했다. 1만 1,000여건에 달하는 각종 공문서에 찍는 도장이 개혁의 걸림돌이라는 판단이다.

일본에서 도장은 문화로 자리 잡았다. 공적 업무는 물론 일상에서의 필수품이다. 관공서나 회사 업무, 은행거래 등에서 도장 없이는 되는 게 없다. 식당에 가도 영수증에 도장을 찍고 택배를 받을 때도 확인 도장을 날인한다. 매번 후한 대접을 받아온 도장이 찬밥 신세다. 스가 정권의 '적폐 1호'로 지목되면서 퇴출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가 재택근무를 권장했다. 그런데 웬걸, 공무원과 직장인들이 사무실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기업 간 계약이나 행정 관련 서류에서 서명보다 도장을, 그것도 인감도장을 선호하는 영향이 크다. 도장에도 예절이 있다. 아랫사람은 도장을 비스듬히 찍어야 한다. 윗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다.

도장 문화가 사회 발전을 해친다는 지적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의 '도장 철폐'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인장 업계의 반발과 로비가 컸다. 정치인들은 ‘일본의 인장 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까지 결성했다. 다케모토 나오카즈(竹本直一) 당시 과학기술·IT담당상이 대표였다. 최첨단 기술을 관장하는 부처의 장관이 '구시대 유물'로 불리는 인장 관련 단체의 수장을 맡는 일이 벌어졌다. “오해가 있을 수 있다”며 결국 물러나긴 했지만.

스가 정권 '적폐 1호'로 몰린 日 도장문화...인감제도 유지하는 우리도 남 말할 처지 못 돼

우리라고 다를까. 그간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갈 길이 멀다. 서명이 도장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으나, 앞장서야 할 공공 부문의 행보는 유독 더디기만 하다. 인감도장 제도가 아직도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증기술의 진전에 따라 그래봤자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정작 도장보다 더 빨리 없어져야 할 존재는 따로 있다. ‘눈도장’이다.

눈도장 하면 떠오르는 게 결혼식장 풍경이다. 혼주에게 인사만 하고 예식은 보지도 않고 식사 장소로 직행하는 하객들이 적지 않다. 신랑신부 친구나 혼주의 친지 말고는 대개 그렇게들 한다. 휴일과 휴식을 포기하고 교통체증까지 무릅쓰고 가서는 예식에는 관심이 덜하다. 축하가 목적이 아니라 눈도장이 목표다. 재택근무 중 도장 때문에 출근하는 일본인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눈도장은 근로자를 피곤하게 만든다. 재택근무가 늘면서 새로운 근무 풍속이 생겼다. 몇 분 간격으로 마우스를 움직이거나 키보드를 두드려야 한다. 혹시 모를 회사의 감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보안을 위해 출입구에 지문인식기를 부착하는 기업도 있다. 이쯤 되면 눈도장 아닌 ‘손도장’ 단속이다. 첨단 기술이 출퇴근 근태관리용으로 쓰이는 게 왠지 어색하다. 일본의 과학기술·IT 담당 장관이 도장 지키기 연맹의 회장을 맡은 거나 엇비슷하다.

눈도장은 기업인도 괴롭힌다. 하루 24시간을 분초 단위로 쪼개 써야 하는 이들에게 시간은 돈보다 소중한 자원이다. 슬프게도 이해관계자의 눈도장을 찍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하는 게 기업인들의 일상이다. 무슨 떼돈 버는 것도 아닌데 오라는 곳도 많고 손 벌리는 곳도 많다. 거래처는 물론 유관기관, 동문, 종중, 동호인 모임 등에서 자주 얼굴 보여주기를 바란다. 기대보다 강요에 가깝다.

힘없는 자 괴롭히고 힘 있는 자 덕 보는 ‘눈도장 문화’...퇴출 서둘러 사회적 낭비 막아야

모임에 빠지게 되면 막역한 관계가 소원한 사이로 돌변한다. 오랫동안 유지된 관계가 돌연 단절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해야 한다. 신세 진 것도 없는데도 여기저기 발품을 팔며 얼굴을 들이미는 수고를 마다하면 안 된다. 김영란법 시행과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그나마 나아졌다는 게 이 정도다. 이런 모순과 낭비가 없다.

기업인이 있어야 할 곳은 사업장이다. 그곳에서 연구개발, 기술혁신, 판로확대, 경영관리에 골몰해도 부족할 판이다. 외부 행사나 기웃거리며 허비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더구나 움직이면 돈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이 부럽다. 일본 중소기업 경영자들은 일 년에 한두 번 해외거래처 방문 때 말고는 사업장을 비우는 일이 거의 없다. 그들의 탄탄한 경쟁력이 현장에서 나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벤치마킹 감이다.

피해자가 있으면 수혜자도 있는 법. 눈도장으로 덕을 보는 쪽은 힘 있는 정치인들이다. 지지 세력을 결집하고 정치자금을 비축하는 다중 혜택을 누린다. 의정보고, 세미나, 간담회, 좌담회 등 온갖 명목으로 사람들을 무시로 불러댄다. 그 바쁜 국정의 와중에 언제 책을 쓸 시간이 있었는지, 저마다 출판기념회 경쟁이다. 치적 알리기 일색의 허접한 내용을 읽어볼 자 많지 않은데도 말이다.

정치인도 무서워하는 천적의 도장이 있다. ‘언론의 눈도장’이다. 언론 취재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모습이 판이하다. 회의 참석보다 보도 자료 작성에 더 공을 들인다. 이래저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눈도장 문화, 이제 없앨 때도 되었다. 일본 정부가 도장 없애기로 행정개혁을 시도하는 동안, 우리는 한발 앞서 ‘눈도장과의 전쟁’으로 사회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남의 나라 얘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필자 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논설실장

- 부설 금융소비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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