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산어보'와 정약전·정약용 형제
영화 '자산어보'와 정약전·정약용 형제
  • 박석무
  • 승인 2021.04.26 11:46
  • 댓글 1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석무 칼럼] '자산어보’라는 영화 한 편을 관람했습니다. 손암 정약전의 저서가 영화화되었다는 점과, 정약용과의 인연도 깊은 책이어서, 그런 영화는 관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절해의 고도 흑산도에서 귀양 살던 정약전의 삶이 얼마나 슬프고 외로웠으며, 세상에 드문 대학자가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 시대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통함 때문에 가슴 저리는 아픔을 견디면서 화면을 지켜보았습니다. 망망대해의 거칠고 무서운 파도를 헤치며, 파도와 풍랑과 사투를 벌이며 고기를 잡아 올려 어족(魚族)을 연구하던 생물학자의 모습은 모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네 살 터울의 두 형제는 동포형제로서 세상에 둘도 없는 지기(知己)였습니다. 동급의 개혁 의지, 동급의 학문 수준, 나라와 민족을 그렇게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겼던 애국자 형제였습니다.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같다면서, 기어코 죽이려고만 했던 무서운 신유옥사(辛酉獄事), 그러나 죽을 죄를 저지르지 않았던 이유로 다산과 손암은 살아서 귀양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천도가 있고 백성들의 눈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1758년에 태어난 정약전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의 벼슬에 그쳤지만, 감히 어느 누가 생각지도 못했던 바다의 어족들의 생태를 연구한『자산어보』를 저술했습니다. 처음에는 물고기들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하려는 뜻에서,『해족도설(海族圖說)』이라는 이름을 생각했으나 아우 다산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림보다는 글로 해석하는 어보를 만들어냈습니다.

영화는 어보를 써 내려가던 모습이나, 물고기를 잡아내 연구·분석하던 모습은 참으로 생생하게 형상화했지만, 손암과 다산 사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왜곡이 있었습니다.

손암은 59세로 1816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다산의 대표적인 저서『목민심서』는 다산이 해배되던 그해 봄인 1818년에 초고를 탈고했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습니다. 흑산도로 찾아간 다산의 제자 이강회가『목민심서』를 보여주며 수정 가필을 손암에게 요구했다는 장면은 전혀 사실일 수가 없으니 어떡해야 하지요.

4서6경에 관한 연구 서적은 손암에게 책을 보내 많은 지적을 받아 수정 가필했다는 기록은 많이 있는데, 목민심서나 경세유표 등은 손암이 사후에 저작된 책이어서, 손암에게는 보여 준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동포형제, 함께 천주학에 기울였다가 함께 깨끗이 천주교와는 끊었지만, 정치적 이유와 당파싸움의 피해자로 그들은 오랜 귀양살이를 했지만 다산이 말한대로 형은 게으름 때문에 많은 저술을 남기지 못했고, 아우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더 욕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엄청난 저술을 남겼습니다.

형은 귀양살이가 시작되자, 다시 세상에 나가 일할 수 있는 기회는 없으리라고 모든 것을 포기하며 무지렁이들과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우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면서, 비록 다시 나가서 일을 할 수 없다 해도,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저술이라도 남기자면서 500여 권의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젊은 날에도 두 형제는 삶의 태도가 달랐습니다. 손암이 다산에게 “너는 아무개 판서 아무개 참판들과 좋아 지내지만 나는 술꾼 몇 사람과 구애됨 없이 큰소리치며 이렇게 살아간다. 바람이 일어나고 물이 치솟으면 어느 쪽이 서로 배신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윤지눌묘지명) 그러나 다산은 과거에 급제하여 정치적 힘을 지니고, 고관대작들과 함께 세상을 개혁하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출세욕을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처럼 손암은 유배지에서도 술꾼들과 어울리면서 다산처럼 큰 욕심을 부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손암은 끝내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기면서 실학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으니, 두 형제의 위대함은 거기에서 증명됩니다.

※ 우리 연구소에서는「현산어보」라고 읽고 ‘자산’을 ‘현산’이라 읽지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그 책은 뒤에 다산이 읽어보고 제자를 시켜 대폭 보완하고 수정했으니 다산과의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석무

· (사)다산연구소 이사장

· 실학박물관 석좌교수

· 전 성균관대 석좌교수

· 고산서원 원장

저서

『다산 정약용 평전』, 민음사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역주), 창비

『다산 산문선』(역주), 창비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한길사

『조선의 의인들』, 한길사 등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진한 2021-04-26 21:27:45
국사 성균관(성균관대)나라.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 승계 성균관대는 국내외에서 6백년 넘는 역사를 행정법.국제관습법으로 인정받고 있음.Royal성균관대.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패전국 일본 잔재이자, 불교 Monkey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어왔음.*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http://blog.daum.net/macmaca/1467

  • (주)서울이코미디어
  • 등록번호 : 서울 아 03055
  • 등록일자 : 2014-03-21
  • 제호 : 서울이코노미뉴스
  • 부회장 : 김명서
  • 대표·편집국장 : 박선화
  • 발행인·편집인 : 박미연
  •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58, 1107호(여의도동, 삼도빌딩)
  • 발행일자 : 2014-04-16
  • 대표전화 : 02-3775-4176
  • 팩스 : 02-3775-41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미연
  • 서울이코노미뉴스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서울이코노미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eouleconews@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