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서 칼럼] ‘LH사태’로 공기업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져서일까? 일부 공기업들의 볼썽사나운 모습이 하나 둘 까발려지고 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칠 만한 사안들도 확대 재생산의 과정을 거쳐 가차 없이 뭇매를 맞고 있다.
김우남 마사회장의 ‘갑질 폭언’ 사건도 그 중 하나이다. 지난 2월 취임한 김 회장이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을 비서실장으로 뽑으려다 담당 간부가 따르지 않자 육두문자를 섞어 폭언을 퍼부었다는 것이 사건의 개요다. 마사회 노조가 그의 육성이 담긴 녹음 파일을 공개하면서 파문이 커졌다. 해당 전직 보좌관은 매월 700만원을 받은 비상근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낙하산 기관장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고 모든 언론이 일제히 비판했다.
여기에다 문재인 대통령의 감찰 긴급 지시로 파문은 더욱 커졌다. 문 대통령은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를 강조했다. 그 만큼 악성의 소지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기업 사장의 행태 문제로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자진 사퇴를 암묵적으로 요구한 메시지로 해석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대통령의 지시가 나온 직후 사과를 했다. 하지만 감찰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자리를 지키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일단 물러난 뒤 감찰을 받는 것이 순리라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거취와 관련한 더 이상의 의사 표명은 없었다.
사퇴 압박 분위기에도 김 회장이 버티기를 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자진 사퇴 의사는 없어 보인다. 곰곰이 따져보니 그렇게 해야 할 김 회장 나름의 이유도 서넛은 되는 것 같다.
우선 사건의 발단인 비서실장 채용 문제는 본인이 처음부터 주장했던 대로 내부 규정 상 문제가 없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임의 채용을 못하도록 관련 규정을 개선토록 권고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반기를 든 인사 담당 간부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고 여겼을 법하다.
두 번째는 이런 일로 담당 간부에게 폭언을 한 것이 물러날 사유는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다. 잘못은 했지만 사퇴를 해야 할 만큼 ‘죽을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마사회 폐쇄적 조직 문화 강해…이익에는 철저, 내부 잘못에는 너그러워”
세 번째는 마사회 노조에 대한 섭섭함이다. 김 회장은 취임에 앞서 반대 투쟁에 나선 노조와 몇 가지 합의를 했다. 온라인 마권 발매 추진, 고용 및 임금 안정 등 노조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고, 노조는 즉각 반대 투쟁을 거뒀다.
온라인 마권 발매는 온 나라를 도박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입법화 문턱을 넘지 못하는 민감한 사안이다. 국회 상임위원장 시절 김 회장은 마사회 급여와 복지 축소를 주장해 왔다. 너무 방만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신은 결국 무소신으로 바뀌었다. 온라인 마권 발매 추진은 본인이 적임자인양 가는 곳마다 앞장서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렇게 성의를 보였는데도 노조는 녹음 파일을 공개하며 뒤통수를 쳤다. 그러면서 김 회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네 번째는 마사회 특유의 조직 문화다. 마사회는 거액의 현금이 오고 가는 사업 특성 때문인지 폐쇄적인 분위기가 짙다. 취업준비생들에게는 ‘신의 직장’으로 불리지만 ‘끼리끼리’를 강조하는 배타적 분위기도 간혹 배어나온다. 조직의 이익에는 철저하지만 내부 구성원의 잘못에는 너그럽다.
얼마 전 감사원이 발표한 마사회의 고객만족도 조작도 이러한 조직 문화의 결과물일 것이다. 직원들의 지인과 가족까지 동원해 조사 결과를 불법적으로 조작해 정부로부터 최상급 판정을 받았다.
김 회장이 이런 문제점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마사회 전문가다. 그런 그에게 인사 담당 간부는 비서실장 채용 문제를 놓고 까탈스럽게 나왔다. “너희는 어땠는데…”. “분통이 터져 잠을 설쳤다”는 김 회장의 녹취록 속 언급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사정이 이런데도 모든 비난은 김 회장에게 쏠리고 있다. 마사회는 제대로 하려고 했는데 김 회장이 말썽을 저질러 평지풍파을 일으켰다는 쪽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온라인 마권 발매는 온 나라 도박장 만들기”…“몰염치하게 알면서도 추진”
그러나 그렇게 끝날 일은 아닌 것 같다. 김 회장 사건으로 마사회가 주목의 대상이 됐고 일부 누적된 현안들이 쭈볏쭈볏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마사회는 태생적으로 공기업이라고 하기엔 부적절하다. 명목이 ‘사행산업’으로 포장됐을 뿐 경마는 도박이다. 카지노를 운영하는 강원랜드와 다를 바 없다. 태생이 그렇다면 조직원들이라도 공기업 조직원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 명분상이더라도 공적 임무, 즉 봉사와 희생의 모습이라도 보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마사회가 내세우는 공적 사업은 ‘말 산업 발전’이 대표적이다.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 문승원 기수는 마사회의 ‘적폐 구조’로 기수와 조교사 등이 당하는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처우를 문제 삼았다. ‘말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면서 정작 그 구성원들은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해 11월 문승원 기수 1주기 추모행사에서 참석자들은 마사회를 “70년 동안 고이고 썩은 거대한 권력”이라고 비판했다.
그 권력이 또다시 탐욕의 손을 뻗치고 있다. 코로나19에 따른 경영위기를 앞세워 온라인 마권 발매를 도입하겠다고 홍보전을 펼치는 등 동분서주하고 있다. 마사회 스스로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몰염치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추세로 코로나는 내년이면 잡힌다. 그러나 온라인 마권 발매가 도입되면 ‘도박병’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개연성이 크다. 요즘 유동성 과잉 속에 속절없이 이어지는 암호화폐 열풍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마사회는 위아래 가릴 것 없이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마사회는 분명히 쇄신 대상이다. 문제거리는 부지기수다. 하지만 김 회장은 개혁보다는 별 탈 없이 안주하려는 마음에 타협을 선택했다. 스스로 도덕적 마비 상황으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안일한 판단과 상식 이하 ‘갑질 행태’로 진퇴양난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자승자박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필자 소개>
-서울이코노미뉴스 부회장
-전 서울이코노미뉴스 대표, 주필
-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
-전 서울신문 편집담당 상무
-전 서울신문 정치부장, 사회부장,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사업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