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코로나19와 여름 휴가, 그리고 독서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코로나19와 여름 휴가, 그리고 독서
  • 조석남
  • 승인 2021.07.1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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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남의 에듀컬처] 조선 세종 8년(1426년) 집현전 학자인 권채 신석견 남수문에게 어명이 떨어진다. ‘일에 치여 제대로 공부할 시간이 없을 테니 당분간 본전(本殿)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열심히 독서를 해 성과를 내도록 하라.’ 휴가를 줘 책 읽기에 전념하도록 한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다. 세종은 짧게는 몇 달,길게는 3년까지 집이나 한적한 절에서 책을 읽도록 배려했다. 독서에 필요한 비용을 대준 것은 물론 음식과 의복까지 내렸다.

세종 6년에 시작된 ‘사가독서제’는 간혹 중단되는 곡절을 겪으면서도 300년 이상 유지됐다. 성삼문 신숙주 서거정 등 걸출한 인재들이 혜택을 받았다. 정조 역시 독서피서를 즐기며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독서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책을 읽으면 몸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심이 서게 돼 외부의 기운이 감히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세기 영국에도 ‘독서휴가제’가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고위직 관료에게 3년에 한 번씩 한 달 가량 유급휴가를 줬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고 지혜와 통찰을 구하라는 취지의 ‘셰익스피어 베케이션’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어김 없이 피서철, 휴가철이 다가왔다. 연일 확진자가 속출하고 있지만, 직장인 가운데 65%는 이번 여름, 휴가를 떠날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이전과 비슷한 수준인데, 휴가철 대규모 이동으로 집단감염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건 아닌지 우려가 커지고 있다.

휴가로 주어지는 여가는 배움의 시간이기도 하다. 농사를 짓는 땅도 봄, 여름, 가을 열심히 일을 하고 겨울에는 휴식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얻듯이 배움을 통한 휴식 과정을 거쳐야만 지속적으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이번 여름에는 인파가 북적거리는 복잡한 휴가보다 ‘쉼’과 ‘회복’을 주제로 책을 통해 자기를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휴가가 됐으면 한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이웃, 힘들어하는 이웃이 많을 때 고개 돌리고 흥청망청할 게 아니라 자신을 재충전하는 기회를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선현들은 여행과 휴가를 책읽기의 방편으로 많이 활용했다. 『청장관전서』에는 이덕무가 구양수의 문집을 싸들고 북한산으로 향하는 친구 이중오에게 써준 글이 실려 있다. 글귀 중에 ‘산수 중에서 맑고 시원하기로 북한산만한 게 없으니, 구양수의 글을 읽는 데 북한산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느냐’는 말이 눈길을 끈다.

연암 박지원은 사촌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옷을 벗거나 부채를 휘둘러도 불꽃 같은 열을 견뎌내지 못하면 더욱 덥기만 할 뿐’이라며 ‘책읽기에 착심(着心)해 더위를 이겨나갈 것’을 권고한다. 조선 중기 문신 윤증이 쓴 「더위(暑)」라는 시에는 옛 선비들의 여름 독서 모습이 함축적으로 표현돼 있다.

‘구름은 아득히 멀리 있고 나뭇가지에 바람 한 점 없는 날/ 누가 이 더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더위 식힐 음식도,피서 도구도 없으니/ 조용히 책을 읽는 게 제일이구나.’

책읽기를 뜻하는 한자말에는 ‘독서’ 말고도 ‘간서(看書)’, ‘피서(披書)’ 등이 있다. ‘독서’가 보통 정독이나 숙독처럼 정신을 몰두해 하는 책읽기를 말한다면, ‘간서’나 ‘피서’는 가벼운 책읽기에 가깝다. 철학, 역사서와 같은 딱딱한 책보다는 소설, 추리물에 어울리는 독서법이다. 이렇다보니 무더운 여름철의 책읽기는 독서보다는 ‘피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여름 휴가철마다 ‘읽을 만한 책’ 목록이 나오지만, 여행 가방에 책을 고이 챙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손바닥만한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친구가 올린 맛집 사진도 즉시 확인하고, 최신 연예 소식도 알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수영복과 자외선 차단제 사이에 책 몇 권은 꼭 넣어갔으면 한다.

‘책은 배반을 모르는 인간 사상의 친구’라고 한다. ‘사상의 친구’와 그래도 가깝게 할 수 있는 때가 휴가철이다. 일상의 권태를 씻어내는 것도 피서길에서다. 가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활짝 넓히는 일에 시간을 내보자.

추억이 살아 숨쉬는 고향집 툇마루나 피서지 옆 느티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아 책을 읽는 재미. 자연의 화음인 매미 소리, 솔바람 소리와 함께 책장을 넘기는 재미. 이번 휴가엔 이런 멋진 ‘여름 풍경’을 기대해 본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 소개>

조석남(mansc@naver.com)

- 극동대 교수

- 전 한국폴리텍대학 익산캠퍼스 학장

- 전 서울미디어그룹 상무이사·편집국장

- 전 스포츠조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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