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남 학술교류의 자취를 찾아서
영·호남 학술교류의 자취를 찾아서
  • 곽진
  • 승인 2021.07.27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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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진 칼럼] 전통시대의 빼어난 말솜씨와 문장은 세상에 나아가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말솜씨이며 문장인가가 핵심이다. 올바른 문장과 말솜씨란 그 시대가 안고 있는 핵심 문제를 해소하려는 진정성 유무가 가른다. 유학의 학문관은 인간다움의 길을 가려는 학술과 문장이다. 공자께서 사람이 길<>을 넓히지 길이 사람을 넓히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이 그 세상의 주인이 되는 참다운 인간의 길이 도()의 본질이란 것이다. 참다운 인간의 길이란 상식의 현재적 구현이다.

16세기 조선 유학은 인간다움의 원리 탐구와 그 회복에 천착했고 그것을 삶에 실천코자 했다. 사회적 장유(長幼)의 담을 넘어 도()의 본질에 대하여 매섭게 다투고 거침없이 토론하였다. 안동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광주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이 벌인 치열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 그것이다.

이 토론은 조선조 학술사 발전에서 서찰 토론의 보편화라는 방식으로 기여한 공로가 크다. 스승인 퇴계는 고봉의 비판에, ‘어린 녀석이 감히 스승에게 맞서려는 것인가!’라고 고깝게 여기지 않고 78년 동안 편지로 논쟁한다. 스승과 제자라는 자리에 구애되지 않고 진지하게 벌인 논쟁은 흔치 않았다.

두 분이 벌인 서한(書翰) 논쟁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학술 토론의 트렌드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퇴계 시대만 하더라도 학문과 관련된 어떤 주제든 그 시대 문화 권력자의 주장이 정설(定說)로 굳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비판과 반비판의 과정을 거쳐 인정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유학의 빛나는 성과는 이 때문이다.

19세기 영·호남의 학문 소통과 그 실천

두 분이 벌인 토론의 여운이 수백 년을 넘긴 20세기 초, 두 가문의 자손들이 학문적 유산을 계승했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병합되자 그해 96, 퇴계 후손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순국(殉國)했다. 그가 순국하자 맏아들 이중업(李中業)과 안동 유림들이 향산묘문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위촉했다.

그는 기대승(奇大升)의 방손(傍孫)이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호남 의병장으로, 학문과 절의를 갖춘 시대의 거목이었다. 천 리 먼길을 돌아 자신을 찾는 퇴계가() 후손들의 속내를 읽은 그는, ‘퇴계선생의 도학과 향산의 절의가 이름은 다르지만 그 공로는 같다고 평가한 다음 장편의 추모문을 지었다.

그리고 20세기 초 다시 영호남 학문적 교류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전남 곡성 완계정사(浣溪精舍)가 그 중심이다. 정사의 주인인 분암(憤庵) 안훈(安壎)은 당시 거창 다전(茶田)에서 강학하던 곽종석(郭鍾錫) 문하에서 어두운 시대를 밝힐 불씨를 찾고 있었다.

앞서 그는 고향 선배인 송사(松沙)의 각별한 아낌을 받아왔고, 그가 타계하자 가슴을 울린 만시(挽詩)를 바친다. 완계(浣溪)에서 맺어진 영호남 학인들의 학술교류, 이를테면 곽종석, 기우만(奇宇萬), 안훈(安壎), 이중업(李中業), 하겸진(河謙鎭), 곽윤(郭奫), 김황(金榥), 최익한(崔益翰), 그리고 분암의 문도들이 펼친 구국 활동은 1919년 한국유림독립운동과 이후의 독립운동의 에너지가 되었다.

조선 500, 유교가 지배해온 나라인데도 1919년의 3?1독립운동 민족대표에 유림은 보이지 않았다. 유림들에게 가해진 그 모멸감이 당파의 벽을 넘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유림의 총의로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서는 한국 유림들이 학맥의 높은 벽을 허물고 세계 인류의 보편적 양심의 회복을 강조하면서 이()의 논리로 세계인들을 설득하려는 운동이었다. ‘()’의 활용을 주자학이나 퇴계학의 범위 안에 한정하지 않고 칠흑 같은 시대적 상황을 헤쳐나가려는 이념적 근거로 삼았다. 세계를 상대로 독립을 호소한 장서운동은 이()의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이었다.

곡성 완계정사는 단순한 강학당이 아니었다. 시대의 민감한 정보들이 모이고 학맥이 교차하는 전선이었다. 영호남 학인들이 구국의 지혜를 찾고 학문적 편당(偏黨)을 넘어서려 했던 학술교류처였다. 요즘 정치적 이해로 선현들의 남겨주신 영호남의 아름다운 유산들이 오염되고 있다. 각성을 촉구한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글쓴이 / 곽 진
· 상지대학교 명예교수
· (사)다산연구소 이사

· 저서
『김육연구』 (공), 태학사
『장현광연구』 (공), 태학사
『용산일고』 (역주)
『창와집』 (역주) 등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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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7-28 12:46:30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부분의 유림대표가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 후 곽종석 ·김복한 ·하용제(河龍濟) 등은 감옥에서 순사하고 그 밖의 인사들도 일경의 고문에 못 이겨 죽거나 처형되었다

http://blog.daum.net/macmaca/3162


.고종밀명받은 유림들.대한독립의군부조직,대규모 독립운동획책,발각.

윤진한 2021-07-28 12:44:58
(金昌植)이 붙잡힘으로써 조직이 발각되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임병찬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한독립의군부 사건 관련자는 모두 54명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이 가운데 왕산 허위의 일족, 부하 또는 교유가 가장 많다고 파악했습니다. 실제로 허위의 사위인 이기영, 비서인 이기상 형제가 참여했고, 허위 부대의 참모를 지낸 여영조, 허위의 부하인 정철화도 참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림들의 파리장서 운동은 이렇습니다. 3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儒林)대표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등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서명하여 이를 김창숙이 상하이[上海]에서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것이다. 그러나 일경(日警)에게 발각되

윤진한 2021-07-28 12:43:55
유림들이 3.1운동에 참여치 않은것은,그 선언서에 왕정유지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왕당파 유림이 참여하기 곤란하여서 그러함. 고종의 승하때문에도 일어난 3.1운동임. 구한말 의병과 고종의 밀칙받은 유림들의 항거로 임시정부가 수립된것임.

유림들의 파리장서 운동.유교계는 3ㆍ1운동보다 7년 앞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어 많은 핵심 인물들을 잃은 바가 있었습니다. 아래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던 임병찬(林炳瓚)이, 귀양에서 돌아온 뒤인 1912년 고종의 밀칙을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동지를 모으기 시작하여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는데, 1914년 5월 23일 동지 김창식(金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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