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차별금지법,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 주윤정
  • 승인 2022.02.2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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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정 칼럼] 최근 한 20대 남성과 군대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군에서 전역을 한 그는 군대에서의 위계폭력과 인권침해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성장해 선진국 시민으로 대한민국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던 20대 청년들에게 군대는 타임머신을 타고 30년전 민주화 이전의 대한민국으로 시간여행하는 놀라운 경험이라고 한다.

한때 군대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현대적인 조직이었기에, 근대화의 선봉 노릇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군대의 조직문화는 충격 그 자체이다. 이전에는 군대식 조직문화와 인사관리 방식은 한국 사회 일반과 연결이 되었기에 군대식 상명하복의 위계적 조직문화가 옳고 그름을 떠나, 사회의 경험, 인맥, 조직 운영 능력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청년에 의하면 글로벌 기업의 수평적 조직문화, 포용적인 팀플레이가 강조되는 오늘날, 군대식의 위계적이고 억압적인 조직문화는 오히려 군대 이후 사회생활에 방해가 되고, 후진적 문화로부터 선진국 수준으로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청년은 미국군의 조직문화가 한국군에 비해 비교적 민주적으로 보이고, 미군의 성희롱 처벌이 강력하단 말을 덧붙였다.

미국의 민권법과 평등한 기회

이 청년에게 미국군의 조직문화는 왜 달라 보였을까? 미국의 군대에는 민권법 등 평등규범을 토대로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고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가 있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8군에도 ‘평등한 기회’ 부서가 있다.

“미8군은 인종, 색깔, 젠더 정체성을 포함한 젠더, 종교, 태어난 나라, 성적 지향과 상관없이 누구나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대우를 제공해야 하며, 불법적 차별과 공격적 행위에서 자유로운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는 미국의 민권법의 7조, 직장내 평등한 기회에 대한 조항에 근거하고 있다.

미국 민권법은 흑인 인종차별반대 운동으로 시작해, 여성운동, 모든 종류의 반차별 운동에 힘입어 미국 사회의 고용과 교육에서의 평등한 기회보장의 핵심근거로 작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차별금지법이다. 미국의 모든 정부 부처에는 평등한 기회 보장을 위해, 민권 사무소, 평등기회 사무소 등을 설치했다. 이런 부서를 통해 평등규범은 법적 제도와 조직문화로 실행된다.

평등과 차별의 영역은 법적용의 해석례를 통해 지속적으로 확장이 되기도 한다. 한 예로 교육에서의 차별을 금지하는 9조(타이틀 IX)에 의거해, 80년대에는 스포츠에서의 여성 차별 문제가 시정되기도 했고, 90년대에는 교육기관 내에서 여성의 평등한 교육 기회보장을 위해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도록 적용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또한 민권법 기반의 차별금지/평등 규범은 행정기관 내에서 강력한 실행력을 갖기 위해, 부처별로 감독기관이 있으며,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관련 기관의 예산 환수도 강제하는 제도가 있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 시기 해석의 범위에 대해 논쟁이 발생하고 후퇴가 있기도 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이 극심한 인종차별, 불평등 등 수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활발한 사회운동 기반으로 만들어진 민권법 및 차별금지법제가 고용과 교육영역에서 강력한 사회적 제도로 존재하기에 다양한 구성원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조치가 있다.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2021년 3월 3일 세상을 하직한 변희수 하사는 “모든 성소수자 군인들이 차별받지 않는 환경에서 각자 임무와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지만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약 변희수 하사가 한국군이 아닌 미국군에서 복무를 했다면, 그는 평등기회 부서에 찾아가 신고를 했을 것이고, 변희수 하사에게 부당한 조치가 취해진 바 없는지 상급자들에 대한 조사 이후 시정조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니 트랜스젠더가 4성 장군이 되기도 하는 미국군에서 변희수 하사는 신고할 문제가 애초에 없었을 수도 있다.

과학기술학에는 필수통과점이란 개념이 있는데, 이는 한 연결망이 다른 연결망으로 전환되기 위해 반드시 거칠 수밖에 없는 지점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는 현재 선진국으로 도약의 목전에 놓여있는데, 차별금지법/평등법은 사회의 전환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통과점이다.

하지만 이를 외면하며, 사회적 합의 뒤에 숨어, 21세기의 청년들에게 후진적인 위계폭력, 성희롱·성폭력, 인권침해, 그로 인한 굴욕과 모멸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사회가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돈이 많다고, 군사력이 강하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책임있는 어른이라면 우리의 미래세대들에게 불행한 과거를 강요하지 않기 위해 결단을 해야 한다.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말이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글쓴이 / 주 윤 정
·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선임연구원
·
· 연구 논문
『탈시설 운동과 사람중심 노동: 이탈리아의 바자리아법과 장애인 협동조합운동』 담론 201, 2019, 22(2)
『법 앞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해방과 기다림의 정치』 민주주의와 인권, 2018, 18(4)
『동아시아 시각장애인의 생존권의 비교: 일본·대만·한국의 시각장애인 안마사업권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2017, 115
『‘사람 취급’ 받을 권리―1970년대 시각장애인 안마사 생존권의 역사』 역사비평, 2013,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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