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문화와 실학’을 생각한다
‘조선후기 문화와 실학’을 생각한다
  • 노관범
  • 승인 2022.03.3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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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관범 칼럼] 한 가지 퀴즈. ‘조사실’ 세 글자의 뜻은 무엇일까. 이것은 사람을 불러 사건을 조사하는 조사실은 아니다. 대학 교양 수업 이름이다. 정확히 말하면 약칭이다. 그렇다. ‘조선후기 사회와 실학’의 줄임말 조사실이다. 이 수업을 수강했을 학생들은 실학을 어떤 모습으로 보고 있었을까. 혹시 실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수업 이름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까.

‘조선후기 사회와 실학’이라는 이름에는 실학을 보는 관점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사회이다. 대개 A와 B라는 문구에서 A는 대상 B에 접근하는 관점으로도 기능하는 법. 실학을 보는 관점을 어떻게 사회가 장악하게 되었을까. 사회 대신 문화는 적합하지 못했을까. ‘조선후기 문화와 실학’ 대신 ‘조선후기 사회와 실학’이라. 문득 이 제목에 흥미를 느낀다. 어쩌면 실학 개념에 들어가는 입구가 여기에 있을지 모르겠다.

실학의 관점으로서 사회에 함축된 뜻은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는 조선후기 사회변동과 근대라는 특정한 관념이 내장되어 있다. 조선후기 농업, 상업, 수공업 등 여러 부문에서 봉건사회 해체를 촉진하는 역사적 변화가 발생했고 이와 맞물려 실학이라는 개혁 프로젝트가 전개되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재적 근대로부터 실학의 학술 감각이 뚜렷해졌다.

관점과 지식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본래 한국사 지식에서 실학을 지배한 관점은 사회가 아니라 문화였다. 조선후기 영정조 치세에 문화가 꽃피어 많은 학자가 배출되고 많은 문헌이 산출되었다는 것. 20세기 전반의 한국사 교과서는 조선후기 문화의 융성을 즐겨 말했다. 20세기 후반 실학 연구가 진전되면서 실학의 인식이 문화에서 사회로 이동했을 따름이다.

사실 문화는 조선시대의 성쇠를 인식하는 개념적 틀로 작용했다. 이를테면 현채의 『동국사략』(1906)은 조선시대의 문화 발달(성종), 문화 침체(양난), 문화 회복(숙종), 문화 융성(영조, 정조)을 말했다. 황의돈의 『신편 조선역사』(1923)는 조선 왕조의 황금시대를 제1기(세종의 문화), 제2기(성종의 문화), 제3기(정조의 문화)로 구분하고 문화의 절정을 제3기에서 구했다.

조선후기 문화의 출발점은 일단 문치였다. 조선 후기 당쟁 속에서도 영조와 정조 시기 성대한 문헌 편찬이 이루어지다니! (현채, 『동국사략』) 영조와 정조의 문치(文治)가 문화의 극성을 초래하고 결국 문약(文弱)의 풍조를 이루게 되다니! (황의돈, 『신편 조선역사』) 문치는 조선후기 문화의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문화의 고전적인 개념이 문치교화임을 고려하면 자연스런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치를 넘어서는 문화도 있었다. 최남선의 『조선역사강화』(1930)는 조선후기 ‘문화의 진흥’이라는 단원에서 자아의 각성을 말했다. 즉, 조선에서는 양난을 거치면서 자아의 각성이 일어나 조선을 탐구하는 실학풍이 새롭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문화의 진흥’을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항목으로 실학풍과 함께 문헌 편찬 사업과 북학론이 제시되었다. 여기서 문헌 편찬 사업이 유교적 문치로부터의 문화 창조를 가리킨다면 실학풍은 민족적 자아로부터의 문화 창조를 가리킨다. 유교적 문치와 민족적 자아는 조선후기 문화의 핵심으로 모두 중시되었다.

이제 문화의 관점에서 실학을 다시 인식할 수 있을까. ‘조선후기 사회와 실학’ 대신 ‘조선후기 문화와 실학’을 생각해도 좋을까. 조선후기 문화에서 유교적 문치, 민족적 자아, 세계적 보편을 함께 통찰하는 것은 실학의 새로운 이해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노 관 범(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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