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핵심 인물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실학의 핵심 인물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 박수밀
  • 승인 2022.12.1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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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밀 칼럼] 일제 강점기에 조선학 운동의 노력 속에서 탄생한 실학은 20세기에 근대의 기원이자 민족정신을 담은 학술 사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실학을 대표하는 핵심 인물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다.

연암과 다산은 각기 우뚝한 성취에 힘입어 고전 지성사의 자랑으로 떠올랐고 고전의 문장가와 경세가를 대표하는 두 개의 별이 되었다. 연암은 1737년에 태어나 1805년에 세상을 떠났고, 다산은 1762년에 태어나 1836년에 사망했으니 두 사람은 거의 동시대를 살아간 셈이다.

그래서인지 종종 두 거인의 만남을 궁금해하는 질문을 받는다. 같은 시대에 큰 위상을 지닌 거인이라면 한두 번은 서로 만났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대답하면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의아해한다.

연암과 다산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연암의 글에는 다산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산의 글에는 연암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읽었다는 기록이 보이는 정도이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다산의 「효자론孝子論」, 「열부론烈婦論」, 「충신론忠臣論」은 『열하일기』 8월 10일자 기사에 나타나는 충효열忠孝烈 대화의 영향이 강하게 스며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접점을 더 찾자면 다산은 연암의 제자인 박제가와는 가까이 교류했다. 박제가가 검서관이 된 덕분에 정조의 지우를 받으며 규장각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 인연이 작용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 정도일 뿐, 둘의 인간적인 인연은 확인되지 않는다.

연암과 다산이 직접 만나야 할 하등의 조건이나 이유는 없다. 스물다섯이라는 나이 차이는 적지 않거니와, 한 사람은 과거를 포기한 채 생의 절정기를 재야에서 무직으로 지냈고, 한 사람은 과거에 합격 후 국왕의 총애를 받아 정치 요직을 역임하다가 18년간 머나먼 타지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게다가 조선은 당파와 학맥이 개인의 사상과 세계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나라이다. 연암은 노론이었고 다산은 남인이었다. 연암은 당색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았으나 다산은 실학의 종장으로 일컬어지는 성호 이익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경세치용(經世致用)-이용후생(利用厚生)-실사구시(實事求是) 흐름으로 이어지는 실학의 과정에서, 다산은 뒷 시기에 해당하면서도 경세치용 학자로 분류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기질도 전혀 달랐다. 연암은 다혈질의 태양인이었으며, 예법과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즐겼다.

반면 다산은 곧고 반듯했으며 엄정하고 예의가 발랐다. 연암은 술을 좋아했고 다산은 차를 애호했다. 연암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호탕하게 말술을 들이켜는 모습이 그려진다면 다산은 초의 선사를 앞에 두고 단정하게 차를 마시는 형상이 떠오른다.

이같이 접점이 없는 환경과 조건을 지녔음에도 둘에게서 동질성을 느끼는 건 두 사람이 실학을 상징하는 대표 주자인데다 조선 후기 근대적 의식을 지닌 인물로 거론되어 온 때문이다. 실학의 틀로 바라보았을 때 연암과 다산은 현실의 모순을 강하게 비판하고 실제적인 학문을 추구한 학자로 엮인다.

조선풍(朝鮮風)과 조선시(朝鮮詩)는 둘의 동질성을 말해주는 강력한 근거가 되어준다. 연암은 제자인 이덕무가 쓴 시가 옛 중국을 모방하지 않고 지금 이곳 조선의 생활과 풍습, 새와 짐승, 풀과 나무를 이야기했다면서 조선의 노래[朝鮮風]라 불러도 상관없다고 칭찬한다.

다산은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에서 “나는야 조선 사람이니 조선시를 즐겨 지으리.[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라고 고백한다. 연암의 조선풍과 다산의 조선시 정신은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상징하는 개념어로 평가받아 왔다. 나아가 해방 이후 민족주의 기조 속에서 18~19세기 문학과 사회 문화에서 근대성의 징후를 찾아내려는 내재적 발전론이 활발히 일어났을 때, 근대성의 지표를 보여주는 인물로 지목된 이가 연암과 다산이었다.

과연 연암과 다산은 어느 지점에서 갈리는 것일까? 연암과 다산이 지닌 상징성을 고려한다면 둘의 미적 태도를 비교하는 일은 자못 흥미로워 보인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 수 밀(한양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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