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남의 에듀컬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고은 '그 꽃')
깨우침이란 '한 해'라는 산에 오를 때가 아니라, 한 해의 마루턱을 내려올 때 비로소 얻는 것이 아닐까 싶다. 톨스토이는 "가장 큰 행복은 한 해의 마지막에서 지난 해의 처음보다 훨씬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족(自足)할 수 있는 사람 역시 그리 많지는 않을 성 싶은 것이 우리네 인생사인 것 같다.
연말 송년회마다 수많은 '건배사'가 넘쳐난다. 이들 건배사들 가운데 유난히 와닿는게 있다. '걸걸걸'이라는 건배사다. '더 사랑할걸, 더 참을걸, 더 즐길걸.' 하나같이 평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며 아쉬움들이 진하게 묻어난다. 생각해보면 이런 의미의 '걸걸걸'이 비단 이 세 가지 뿐이랴. 더 많이 나눌걸, 더 배려할걸, 더 많이 이해할걸, 더 잘 섬길걸, 더 자주 웃을걸, 더 친절할걸, 더 시간을 아끼며 살걸….
킴벨리 커버거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의 구절들처럼 진작에 알았더라면, 아니 일상에서 실천했더라면 뒤늦게 이럴걸, 저럴걸, 후회하는 일도 한결 적어질 터인데….
교수신문은 올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표현하는 사자성어로 ‘과이불개(過而不改)’를 꼽았다. 이는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 처음 등장하는 표현으로, 공자는 “과이불개(過而不改) 시위과의(是謂過矣)”라고 말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잘못이다’라는 의미다.
교수들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과 소인배 정치를 비판했다. 한 교수는 “잘못하고 뉘우침과 개선이 없는 현실에 비통함마저 느낀다”고 밝혔다. 또 다른 교수는 “진영 간 이념 갈등이 고조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패배자가 될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 일단 우기고 보는 풍조가 만연하다”고 지적했다.
사람이 잘못했으면 깨끗이 사과하고, 고치는 것이 도리이다. 우리도 한 해를 돌아보며, 잘못이 있었으면 ‘참회개과(懺悔改過)’ 하는 연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사 김정희의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나절 책을 읽고, 한나절은 좌선을 한다.' 생활에 쫒겨서 반성할 시간을 갖기가 어려웠다면 지금이 해묵은 때(과오)를 털어내야 할 시간이다. 미운 마음, 섭섭한 일들에서 해방돼야 할 시간이다. 어지간한 욕심 쯤은 손해보는 셈치고 깨끗이 놓아야 할 때이다. 원수진 일 아직도 남아있으면 과감하게 물러설 일이다.
오는 새해를 잘 맞이하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아주 멀리 뒤로 물러서고 싶다. 한 살 새롭게 먹는 만큼 한치만큼이라도 나의 삶이 성숙해지기를 바라서이다. 높이 날고, 멀리 보고, 깨끗하게,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싶은 것이다.
'꽃'은 내려갈 때 비로소 보인다. 욕망과 성공을 향해 더 높이 더 높이 올라가던 그 잘난 시절에는 결코 볼 수가 없다. 꽃은 행복이다. 기쁨이고 희망이고 노래요 꿈이다. 무거운 짐을 벗고 탐욕도 내려놓고 쉴 때 꽃이 길섶 저만치서 조용히 웃는 모습이 보인다. 올라갈 때도 거기 있었다. 눈비가 오고 비바람이 불 때도 꽃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지나온 매 순간이 다 꽃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눈을 가졌었기에 흐드러진 그 꽃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지를 못했을 뿐이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사소한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연말이면 좋겠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몸과 마음이 추운 이웃을 챙기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한 해 동안 남의 마음에 박은 못, 내 몸에 박힌 못 뽑아내고 후련한 가슴, 맑은 머리로 새해를 맞아야겠다.
지난 한 해, 뜻하지 않게 시련을 겪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옴치고 뛸 수 없는 막막한 현실이 거대한 벽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고 견디다 보면 삶은 재건된다'는 게 역사의 가르침이다.
내년은 더 힘들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닥친 국내외 여건이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아서다. 그런 때일수록 저마다 선 자리에서 마음을 다잡고 맞서는 게 중요하다. 주어진 여건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서 견디다 보면 어김없이 봄은 온다.
양팔이 없고 다리에도 장애가 있는 스웨덴 가수 레나 마리아가 '인생은 모든 사람이 받은 큰 선물'이라고 감사해 하던 모습을 떠올려본다. 이제 보름 후면 찾아올 계묘(癸卯)년 새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그리고 새해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또하나 '행운의 선물'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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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조석남 (mansc@naver.com)
- 극동대 교수
- 전 한국폴리텍대학 익산캠퍼스 학장
- 전 서울미디어그룹 상무이사·편집국장
- 전 스포츠조선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