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단상, 나의 경(敬) 공부
새벽 단상, 나의 경(敬) 공부
  • 백민정
  • 승인 2023.02.0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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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정 칼럼] 새 해가 며칠 지났다. 세상에서 가장 야속한 것은 아마도 시간이 아닐까 싶다. 부귀도, 건강도, 행복도 시간이 재촉하면 의미가 없다. 속절 없이 흐르는 시간 앞에서 나는 공부가 필요함을 느낀다.

나의 공부는 어디쯤 왔을까? 숱한 선배, 선학을 앞서 보며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쑥스럽고 부끄럽다. 하지만 내 공부를 돌아보지 않으면 마음이 허무하고 세월의 위력에 겁도 난다. 유학(儒學)을 업으로 삼다 보니 심학(心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심학이 언제 나의 공부가 되었을까? 유학은 항상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말하는데, 그럼 심학은 언제 나를 위한 학문, 나를 살리는 배움이 되었을까?

나는 가만히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본다. 무엇인가 하려고 애쓰지 않고, 때 지난 것을 만회하려고 기를 쓰지도 않으며, 다만 고요히 자신의 모습을 응시한다. 나는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며 옛사람들이 말한 고요함[靜]의 공부, 정좌(靜坐)와 함양(涵養)을 떠올린다.

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제자 곽우인(郭友仁;郭德元)에게 준 배움의 준칙이 있다. “반나절 정좌하고 반나절 독서하라[用半日靜坐,半日讀書]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朱子語類》卷116, 55조목). 주희는 떠나는 제자에게 공부의 지침을 내려준다. 평상시 말 한두 마디 더 적게 하고 한두 사람 더 적게 만나야 공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럴 때 홀로 고요히 정좌하고 독서하라고 권한다.

주희는 신유학의 선배들 정명도(程明道), 이동(李侗)에게서 정좌법을 배웠다. 그는 정신이 안정되지 않으면 도리(道理)가 깃들 곳이 없다고 말한다(《朱子語類》卷12, 學問6, 137조목). 정좌해서 마음을 안으로 수렴해야 우리가 추구하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 정처 없이 밖을 떠돌면 안정되지 않고 집에 돌아오면 편안해지는데, 공부할 때 내가 돌아가는 집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고 했다(上同, 140조목). 독서도 그것이 내 삶의 자양분이 되려면 조용히 앉아 심기를 화평하게 하는 정좌 공부를 해야 한다(《朱子語類》卷11, 學問5, 19조목).

정좌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주희는 조용히 앉아서 선정(禪定)에 빠지는 것, 억지로 생각을 끊어내려고 애쓰는 것은 정좌가 아니라고 말한다. 마음을 안으로 수렴하고 잡다한 상념이 일지 않게 하며 마음을 담연무사(湛然無事)하고 전일(專一)하게 하는 것, 그는 정좌의 모습을 이렇게 풀었다(《朱子語類》卷12, 141조목. “靜坐非是要如坐禪入定, 斷絶思慮. 只收斂此心, 莫令走作閑思慮, 則此心湛然無事, 自然專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는 이 마음을 찾아서 기반[基址]을 닦고 머무를 곳, 존주처(存主處)를 마련해야 비로소 공부도 가능하다고 한다(上同). 독서도, 공부도 심지(心地)를 고요하고 전일하게 만들어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주희가 생각한 정좌는 생각을 없애는 것도, 주정법(主靜法:고요함을 주로 하는 공부)에 빠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되려 고요할 때 스스로 이치를 잘 살피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上同, 142조목. “當靜坐涵養時, 正要體察思繹道理, 只此便是涵養.) 그가 생각한 고요할 때 정좌, 함양 공부는 이렇다. 내 마음 속 생각과 사유의 단초들을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놓아두는 것, 담담하고 안정된 모습. 또 다른 요점은 정좌와 함양을 일용처(日用處),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주희는 외부 사태를 버려두고 고요함만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음의 고요함과 움직임은 마치 물 위에 뜬 배가 조수가 밀려오면 움직이고 조수가 물러가면 멈추는 것과 같다. 일이 있으면 마음이 움직이고 일이 없으면 고요할 뿐이다.”(上同, 143조목) 일이 있으면 일에 따라 반응하고 움직이며 일이 없으면 단지 고요할 뿐인 것, 그것이 정좌하는 마음이다. 원숙한 정좌는 움직이고 작용할 때도 우리 마음을 한결같이 고요하고 전일하게 한다.

마음이 고요할 때 움직임의 단서를 감지하고 마음이 움직일 때 고요함을 직시하는 것, 이 두 방향의 공부를 아울러 유학자들은 경(敬) 공부라고 했다. 경은 고요함과 움직임, 동정(動靜)의 순간을 관통한다. 나 홀로 고요할 때도, 응사접물(應事接物)하며 사태에 임할 때도 경 공부가 필요하다. 이황은 제자들이 사태에 휩쓸리는 것을 미리 두려워해서 지나치게 고요함만 좋아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정재기(靜齋記)」를 지었고 이담(李湛)에게는 「정존재잠(靜存齋箴)」을 지어준 적이 있다. 고요함의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일러준 글이다. 퇴계는 우리가 정(靜), 고요함의 공부를 하는 것은 세상의 동(動)을 운영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관계에서 순조롭게 대처하기 위해 정(靜) 공부도 필요하다는 말이다(《退溪先生文集》卷42, 「靜齋記」).

퇴계가 남언경에게 써준 「정재기」는 동정을 아우르는 경(敬) 공부를 소개한 글이다. 경의 수련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마음을 안으로 수렴하는 것, 의식을 맑고 투명하게 깨어 있도록 하는 것[常惺惺], 마음을 전일하게 해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主一無適], 마음의 안팎을 단속하여 나태함이 없도록 하는 것[整齊嚴肅], 경 공부의 모습은 이러하다. 고요하게 정좌하는 것도 경 공부에 속한다.

이황은 심신을 방만하게 두지 않는 정제엄숙한 태도를 좋아했다. 그는 경 공부로 마음의 주재력(主宰力),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마음이란 거울 같은 것이다. 공부할 때 반드시 경(敬)을 주재처(主宰處)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고요할 때 마음을 잘 지켜서 어둡지 않고 움직일 때 잘 성찰하여 기미(幾微)가 드러나도 혼란스럽지 않다.”(《退溪先生文集》卷10, 「答盧伊齋」)

흥미로운 점은 이황이 경 공부를 말할 때 항상 주정법, 고요함의 공부를 짝으로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의식적으로 경과 주정(主靜)을 함께 내세웠다. “정좌 공부를 해야 몸과 마음이 수렴되어 도리가 머물 곳이 있다. 몸과 마음이 흩어져 방만한데도 통제하지 않는다면 도리가 머물 곳이 없다. 연평(延平) 이동(李侗)이 예장(豫章:羅從彦) 선생을 대하며 종일토록 정좌하다가 귀가해서도 그렇게 공부한 것은 이 때문이다.”(《退溪先生言行錄》).

퇴계에 따르면 경은 동정을 관통하지만 역시 고요함의 공부가 근원, 배움의 원두처라고 할 수 있다. 이황은 문자의 표면을 넘어 책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좌 공부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징험하여 깊고 고요한 정일(靜一) 가운데 말없이 묵묵히 이해해야 글과 말의 겉으로 드러난 의미를 뛰어넘어 자득할 수 있다.”(《退溪先生文集》卷28,「與金而精」). 마음을 수습해서 고요히 돌아볼 때 머릿속 지식과 정보도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공부와 배움이 내 것이 되려면, 그래서 공부가 나를 지키고 나를 살리는 위기지학이 되려면, 홀로 고요히 정좌하며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고요할 때의 공부는 내가 세상에서 익히는 수다한 경험과 지식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1795년)을 쓴 다산 정약용, 당시 다산은 천주교 사건에 연루되어 충정도 지역 금정의 찰방으로 좌천되었다. 그 해 겨울 다산은 금정 지역의 이웃에서 《퇴계집》 일부(문집 제9권-15권)를 얻었고 매일 한 편씩 선생의 편지를 읽으며 자기 생각을 달았다.

다산은 퇴계를 존중하고 높였지만 심중에서는 고요함을 중시한 선배들의 정좌 공부를 배척했다. 고요할 때의 정좌, 묵좌징심(默坐澄心)의 공부는 명경지수(明鏡止水:맑은 거울과 고요하게 그친 물) 같은 마음, 즉 불교적 마음을 위한 공부라고 이해한 것이다. 정약용과 가까운 지기들은 선배들이 익힌 정좌와 함양 공부에 의문을 품었다.

정좌와 함양, 이것은 고요함과 회복의 테마다. 회복이란 무엇일까? 우리 몸에 자연치유력이 있듯 우리 마음에도 유사한 회복력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희구하는 공부와 배움의 목표가 무엇이든, 우리가 공경하는 대상을 이(理)라고 하든, 신명(神明)이라고 하든, 혹은 천주(天主), 상제(上帝)라고 부르든, 우리는 내면으로부터 회복되는 힘과 근원을 떠올릴 수 있다.

회복하기 위해서도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는 것, 조용한 응시와 침잠의 순간이 필요하다. 나는 고요함과 회복의 힘을 믿는다. 거센 풍파와 격류에도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힘, 그것은 고요함의 공부에서 시작된다. 부단한 움직임 속의 깊은 고요, 정좌와 함양, 그리고 경 공부가 추구한 이상적 마음이다. 오늘 새벽 짧았던 단상, 나를 위한 경 공부는 어디쯤인지 물어본다. 내 공부가 멈추지 않는다면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 소개

백 민 정(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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