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 모금 창구’된 출판기념회...‘악순환의 고리’ 끊어야
‘정치자금 모금 창구’된 출판기념회...‘악순환의 고리’ 끊어야
  • 조석남
  • 승인 2023.02.0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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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기념회’는 온전히 문인에게, ‘진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조석남의 에듀컬처]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를 1년여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입지자들의 출마 움직임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가 ‘출판기념회’를 비공식적인 선거 활동 개시의 수단으로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2월 1일에는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유력 의원이 출판기념회의 포문을 열었다. 바야흐로 ‘출판기념회 시즌’이 도래한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이 이처럼 책에, 출판에 관심이 많으니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그토록 염원했던 ‘독서르네상스’가 드디어 펼져지는 것인가? 아니다. 출판기념회는 정치인에게 있어 ‘전가의 보도’와 같이 쓰이는 ‘홍보 수단’이다. 누구나 출판기념회를 열 수 있고, 선거일 전 90일부터 선거일까지만 제한된다.

책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간혹 정성을 들여 펴낸 듯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역과 대한민국, 자신의 이름에 삶, 정치역정, 철학, 비전, 희망 등의 단어를 더한 제목 아래 신문 잡지에 기고했던 자화자찬 에세이나 의정보고서를 담은 것들이다. 심지어 여기저기서 찍은 인증사진 종류를 모은 화보집 같은 것도 있다.

애당초 읽으라고 펴내는 것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는 사람 역시 왔다갔음을 알리는 게 목적인 만큼 책엔 관심도 없다. 그저 방명록에 서명하고 봉투를 전달한다. 과거 모 여당 의원의 출판기념회에 관한 보도가 있었다. 축하 화환 80여개와 눈도장을 찍으려는 장관, 여야 의원들, 공공기관장 등 1천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특히 예산배정과 감사 대상기관에서 몰려왔다고 했다.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글쟁이들의 옛 출판기념회는 소박했다. 1955년 첫 시집을 낸 박인환 시인은 문인들이 드나들던 명동 ‘동방싸롱’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시집 출간이 귀하던 시절이라 많은 예술인이 정장을 하고 모였다. 축사와 시 낭독이 끝나자 가수 현인이 감미롭게 샹송을 불렀다. “브라보, 오늘의 시인 박인환을 위하여”라고 건배사를 외친 뒤 술잔이 오갔다. 그 시절 출판기념회는 주머니 가벼운 문인들이 모처럼 신나게 먹고 마시는 축제였다고 한다.

출판기념회란 저자의 땀과 재능, 사상과 철학, 인생과 혼을 담은 작품집의 출간을 축하하기 위한 모임이다. 수필집의 경우, 한 권을 묶으려면 엄격히 정선된 작품 50여편은 있어야 하며, 최소한 2년에서 길게는 십여년이 걸리기도 한다.

더구나 작품집이나 자서전 등은 진실이 담보되는 고통스러운 창작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대필’이란 어불성설이다.출판 비용은 500만~700만원 안팎이며, 거의가 자비로 출판된다. 넉넉하지 못한 문인들로서는 이도 만만치 않아 출판기념회까지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의원들의 출판기념회는 ‘정치자금 모금의 변형된 창구’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지난 2004년 3월 통과된 이른바 ‘오세훈 선거법’에 따르면 정치후원금은 연간 1억5000만원까지만 모을 수 있게 돼있다. 그러나 출판기념회는 ‘경조사’로 분류돼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의원들이 책을 팔고 받은 돈은 법적으로 고스란히 개인 돈이다. 모금 한도도 없고, 회계보고 의무도 없다. 책값은 권당 보통 1만~1만5000원 안팎이지만, 책값만 달랑 내는 경우는 드물다. 책값을 포함해 격려금으로 개인당 5만∼10만원을 내는 게 관례로 여겨지고 있고, 50만∼100만원, 수백만원을 내는 ‘큰손’도 적지 않다. 출판기념회를 치른 경험이 있는 모 보좌관은 “선거를 치르려면 실탄(자금)이 필요하다”며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출판기념회를 할 수밖에 없다”고 실토했다.

출판기념회를 통해 편법으로 후원금을 모금하는 정계의 관행은 없어져야 한다. 출판기념회가 편법으로 후원금을 더 걷는 창구로 활용되면 안된다는 얘기다. 오래 전부터 이에 대한 개선 방안이 거론됐으나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이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후원금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정치권에서 풀어야 할 일이다. 더이상 신성한 ‘출판기념회’라는 이름을 모독해선 안된다. 그리고 ‘출판기념회’를 온전히 문인에게, ‘진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 소개>

조석남 (mansc@naver.com)

- 극동대 교수

- 전 한국폴리텍대학 익산캠퍼스 학장

- 전 서울미디어그룹 상무이사·편집국장

- 전 스포츠조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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