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과 다산, 천자문을 의심하다
연암과 다산, 천자문을 의심하다
  • 박수밀
  • 승인 2023.02.21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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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밀 칼럼] 『천자문(千字文)』은 주흥사가 양 무제의 명을 받아 쓴 책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문자 학습의 기초 교재가 되어 지식의 입문서 역할을 했다. 아이들은 문자를 배울 나이가 되면 서당이나 집에서 『천자문』을 달달 외웠다. 『천자문』은 인간사를 망라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어린이들의 사고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연암과 다산은 『천자문』에 의문을 품는다.

연암은 짧은 편지글에서 한 꼬마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하늘은 왜 푸른데 검다고 가르쳐요?” 『천자문』은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으로 시작한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뜻이다. 연암은 『천자문』이 담고 있는 지식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던가? 연암은 당연하다고 믿는 지식이 과연 제대로 된 진실을 담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옥갑야화(玉匣夜話)』」에서는 허생이 자신이 설계한 이상 공간인 무인도(無人島)를 떠날 때 글을 아는 자들을 데리고 나오며, “이 섬에 화(禍)를 없애야겠다.”라고 말한다.

이른바 지식인을 재앙으로 여긴 것이다. 「호질(虎叱)」에서는 독서 군자인 북곽 선생을 심히 꾸짖고 붓(펜)이 날카로운 칼과 화살이 되어 함부로 찌르고 서로를 잔혹하게 죽이고 있다고 힐난한다. 연암은 문자와 지식이 실상을 전달하지 못하며 지식인과 언로(言路)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기존의 지식에 물들지 않은 소경과 어린아이야말로 편견과 선입견에 갇히지 않는 순수한 영혼이라고 말한다.

연암이 문자와 지식의 한계에 주목한다면 다산은 문자와 지식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둔다. 다산은 “문자가 생긴 것은 만물을 분류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다산은 지식의 분류와 계통, 체계를 강조한다. 그리하여 다산은 천자문의 구성 방식을 따진다. 다산이 생각하기에 천자문은 체계도 통일성도 없다.

다산은 말하길, 처음에 천(天)과 지(地)를 배우면 그와 관련되는 자연을 뜻하는 일월(日月), 산천(山川) 등을 배워야 하는데 느닷없이 현황(玄黃)이라고 하는 색깔을 가르친다고 비판한다. 또 현(玄)과 황(黃)이라는 글자를 배웠다면 색을 뜻하는 청적(靑赤) 흑백(黑白) 등을 가르쳐야 하는데 갑자기 우주(宇宙)로 넘어간다고 따진다.

천자문은 두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가 배우기엔 너무 어려워 어린이 학습용 교재로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직접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인 『아학편(兒學編)』을 저술했다.

다산은 지식은 문심혜두(文心慧竇)를 여는 열쇠라고 본다. 문심(文心)은 글에 깃든 정신이고 혜두(慧竇)는 지혜의 구멍이다. 다산은 지식을 체계적으로 잘 배워 지혜의 구멍을 열고 선한 마음을 길러서 독서 군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산이 말하는 독서 군자는 지식과 지혜를 갖춘 도덕적인 인간이다.

그렇다면 참된 지식은 어디에 있을까? 기존의 지식을 회의(懷疑)한 연암은 즉사(卽事), 곧 눈앞의 일에 참된 진실이 있다고 말한다. 연암이 시선을 둔 곳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명을 낳는 자연이라는 삼라만상이다. 그리하여 글의 의미를 자연 사물로 확장하여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책이며 자연 사물의 몸짓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최고의 글 읽기라고 말한다.

연암은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에 관심이 없으면 문심(文心)이 없다고 말한다. 미미한 사물에 애정을 둘 때 글의 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연암은 자연 사물의 생태를 잘 배워 위선적인 지식 군자와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고 지식인과 언로가 바른길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반면 다산은 천지간의 대문장은 세상 물정과 사람들의 인심이라고 한다. 글은 세상을 바로잡아 구제하는[匡濟一世]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산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인간 사회에 관심을 두고 부단히 여기[於斯]와 접촉하여 사회적 약자의 삶에 공감하고 이들 곁에 있으면서 이들을 구제하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이 없는 사람을 구제해 주고 재물이 없는 사람을 구원해주고자 하여 배회하면서 차마 그들을 버려둘 수 없는 뜻을 둔 뒤에야 바야흐로 시가 된다.” 세상과 인간을 향한 이 지점에 다산의 인문 정신이 빛을 발한다.

다산의 인간 중심과 엄격한 도덕률은 휴머니즘과 인간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따뜻하고 자애롭다. 인간과 사회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길 열망했다는 점에서 보자면 두 학자의 궁극의 바람은 다르지 않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 수 밀(한양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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