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漢陽)의 위도, 37도 39분 15초
한양(漢陽)의 위도, 37도 39분 15초
  • 임종태
  • 승인 2023.03.2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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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태 칼럼] 최근 새로 단장한 국립고궁박물관의 과학문화실에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해시계가 몇 점 전시되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모두 서울의 위도 값이 새겨져 있다.

예를 들어 “간평일구(簡平日晷) 혼개일구(渾蓋日晷)”라는 유물은 정조 9년(1785) 조선의 천문관서 관상감(觀象監)이 하나의 돌에 두 해 시계를 새긴 것인데, 오른쪽 아래 여백에 “한양 북극출지 37도 39분 15초”라는 구절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북극출지”란 하늘의 북극이 땅 위로 올라온 높이, 즉 북극고도를 뜻하는 것으로 그 지역의 위도 값이다.

이들 해시계에 서울의 위도가 새겨진 것은 그것이 제작된 정조 시기 조선 천문학의 주된 관심사를 반영한다. 이는 조선의 경위도에 입각한 천문학을 구현하겠다는 것으로,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천문학의 개혁을 주도했던 사대부 수학자 서호수(徐浩修, 1736-1799)가 표방한 지향이었다.

당시 관상감은 청나라의 천문 서적 『역상고성(曆象考成)』에 입각하여 달력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서호수는 북경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청나라 천문학을 조선 지역에 맞게 변용(變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절기 시각과 밤낮의 길이는 지역의 경위도에 따라 서로 달라져서 시각 체제와 달력에 큰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서호수가 보기에 당시 관상감(觀象監)은 서울의 경위도에 맞게 천문학을 운용할 능력과 그에 필요한 관측 데이터를 갖추지 못했다. 서호수가 1770년 영조(英祖)의 명을 받아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상위고(象緯考)”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고 조선 지역에 맞는 천문학 체계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담았다. 중국 천문학의 “토착화”라 부를 수 있는 이 과업을 서호수는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관상감의 천문학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아이러니가 있는데, 서호수의 “토착화” 기획을 대표하는 서울의 위도가 실은 조선 천문학자들의 측정값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서호수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상위고”에서 한양 위도 값을 제시한 뒤 “숙종조(肅宗朝) 계사년(1713) 청나라 사람 목극등(穆克登)이 오관사력(五官司曆)을 거느리고 와서 실측한” 것이라고 그 기원을 밝혔다.

청나라 사신 목극등은 그 직전 백두산 지역을 탐사하여 조선·청나라의 국경을 획정(劃定)한 인물로서, 1713년에는 오관사력이라는 벼슬의 천문학자 하국주(何國柱)를 대동하고 서울에 파견되었다. 청나라 사절단에 천문학자가 포함된 것은 이들의 주된 목표가 조선에 대한 천문 · 지리학적 탐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시 강희제(康熙帝)의 명령으로 제작되고 있던 청나라 지도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에 포함될 조선 지도의 제작을 위해 서울을 포함한 조선 지역의 경위도를 측정하고 조선 조정이 보관하고 있는 정확한 조선 지도를 얻고자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조선의 주권을 무시한 “제국주의적” 전횡이라 볼 수 있는 칙사의 요구에 숙종과 신하들은 매우 당혹해했다. 하지만 그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조정은 덜 정확한 지도를 내주는 선에서 타협했다. 마침내 하국주가 관측한 서울의 위도는 “황여전람도”에 수록된 조선 지도의 기초 데이터가 되었고, 청나라의 새로운 역법서인 『역상고성』에 서울의 위도 값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이 청 제국의 판도에 편입된 “속국(屬國)”임을 상징하는 수치가 된 것이다.

하국주의 측정 사실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그 측정치를 관상감의 공식 해시계에 새기는 모습은 서호수와 당시 관상감이 추진한 천문학의 “토착화”가 과연 어떤 이념적 · 문화적 결을 가지고 있었는지의 의문을 제기한다.

한편으로 청나라와 조선의 천문학은 각각 “제국과 약소국”의 과학적 기획으로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둘은 하국주의 측정 행위를 공통의 역사적 기원으로 삼고 있고, 그의 측정치를 둘 사이를 이어주는 과학적 연결고리로 공유하고 있었다.

이는 서호수가 주도했던 18세기 후반 조선 천문학의 기획이 우리에게 익숙한 민족주의의 구도만으로는 잘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임을 시사한다. 필자는 앞으로 1713년 하국주의 사행(使行)을 전후한 시기 청나라와의 과학 교류가 조선의 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18세기를 거치며 조선의 행위자들이 어떻게 그 영향을 소화하며 자신의 과학적 ·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지 살펴볼 것이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임종태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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