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짓단을 늘이며...문득 떠오른 '복수의 화신' 문동은
바짓단을 늘이며...문득 떠오른 '복수의 화신' 문동은
  • 이영미
  • 승인 2023.04.0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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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검사 받고 특수학교 보내"...소심한 나는 도망치듯 관계를 끊어버렸지만 대꾸했어야

[이영미 칼럼] 큰 아이 교복 바짓단을 늘였다. 교복을 구매한지 두 달 남짓 지났지만 그 새 자랐는지, 입학 때 아이가 클 걸 예상하고 나올 때부터 바짓단이 으레 두 단 접혀 나오는데, 그 중 한 단을 늘여 바느질했다.

아이가 크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애 크는 거 열심히 떠들고 다닐 일은 아닌 듯 싶어 말을 아낀다. 키에 대해 속상한 집도 많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부쩍부쩍 큰다는 말이 불편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작은 아이가 평범하지 못하다 보니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신경이 간다. 내 아이 얘기도, 다른 아이 이야기에도 늘 무게를 가져야 한다고 새삼 마음을 다지게 된다.

사실 말 한마디에 신경을 쓰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의 일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같은 동네사는 아이 친구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대뜸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 왜 둘째 자폐검사 안 받아? 치료는 왜 안 다녀? 네 아들 자폐라며? 자폐검사 받고 특수학교 보내. 그러면 더 빨리 좋아진대.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무슨 말이지? 내가 뭘 잘못이라도 했나? 둘째가 그 집에 가서 사고라도 쳤나? 혹시 자폐가 아니라 ‘자세’를 내가 잘 못 이해했나?

갑작스러운 통화...그 통화를 계기로 더 이상 그 엄마와는 연락 않고 ‘손절’

자폐 검사가 신청부터 진단까지 쉽고 짧은 절차가 결코 아닐 뿐더러 특수학교 입학 문제도 그리 쉽게 결정할 일은 절대로 못되는데다 치료는 이미 다섯 가지 과목 넘게 받고 있는데, 내 사정을 알고 한 말이 아닌 건 알지만 이건 선 넘어도 너무 넘은 게 아닌가. 

듣고도 한동안 대꾸를 못 했다. 똑 부러지지도 야무지지도 못한 나라서 대답이 어려웠다. 나쁜 소리도, 설명도 조언도 못 했다. 잘 모르고 한 말이라면 알려주고, 함부로 한 말이라면 차라리 싸웠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쪽도 하지 못하고 그날 그 통화를 기점으로 더 이상 그 엄마와는 연락하지 않고 있다. 요샛말로는 ‘손절’이라고 부른다.

맹자는 ‘말이 쉬운 것은 그 말에 책임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요새 책임을 먼저 떠올리고 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싶다.

소심한 나는 도망치듯 관계를 끊어버렸지만 대꾸했어야 한다. 배려가 아닌 독단과 차별의 말이라고. 심하면 모욕도 될 수 있다고. 몰랐다면 이제부터는 살펴달라고 했어야 한다. 

그러고 또 칼같은 말을 날린다면 그 때는 모든 걸 동원해서 싸우든 했어야 한다. 그 쪽은 말이 먼저나갔고, 내 쪽은 나갈 말이 안 나간 게 문제였다.

나중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데면데면 하다가 불편하고 미적지근한 눈인사만

<더 글로리>의 악역 박연진이 미움을 산 것은 온갖 악행 가운데서 ‘너(문동은)같은 애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지옥이었잖아’라며 잘못을 회피한 것이 가장 커 보인다. 몸에 입은 상처는 어떻게든 견뎠어도 마음에 남은 칼집 같은 상처는 평생에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문동은의 복수도 수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대꾸하지 않고 화 내지 않고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들이 가진 병명을 아직도 입에 담기가 무거워 느린 아이의 엄마들은 흔히 ‘우리 아이들’ 또는 ‘이런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그래도 충분히 대화가 통하기 때문에.

얼마의 시간이 지나 그 엄마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데면데면 하다가 불편하고 미적지근하게 눈인사만 나눴다. 내가 할 수 있는 예절은 거기까지다.

둘째는 자기 병명을 모르지만, 조금씩 자라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늘어나다 보니 그럭저럭 학교 생활을 해 나간다. 반 친구들은 아이를 마치 동생 대하듯 돌봐 주고 이해해준다고 한다. 반에서 도움반으로 갈 때는 잘 다녀오라고 서로 인사를 나눈다.

큰 아이 역시 중학생활을 잘 해 나가고 있다. 문제의 그 엄마 아이와도 다른 아이와도 두루두루 잘 지낸다고 한다. 중학교가 최고라며, 무엇보다 급식이 맛있다고 두 그릇을 못 먹어 아쉽다고 입맛을 다신다. 이토록 아이들의 세계는 훨씬 평화롭고 행복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머지 바짓단 하나를 늘이는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 소개

이영미<klavenda@naver.com>

동화작가/문화예술사

세종대학교 대학원 미디어컨텐츠 박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신문만화

전 명지전문대 글쓰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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