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의 근현대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목민심서의 근현대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노관범
  • 승인 2023.05.22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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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관범 칼럼] 1902년 5월 19일 황성신문은 신간 목민심서를 소개하는 논설을 냈다. 1821년 음력 2월 정약용이 목민심서 서문을 쓴 지 8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책 자체는 이미 필사본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정약용에게 목민심서는 마음의 책에서 그쳤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곧잘 실용적인 책으로 읽혔다. 신간 목민심서 서문을 쓴 엄세영은 자신이 소년 시절부터 이 책을 좋아했고 지방관으로 부임하면 늘 휴대해서 참조했다고 밝혔다.

목민심서를 출판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 전부터 있었다. 신간 목민심서에 서후문(書後文)을 쓴 이중하는 1883년 고종의 어명으로 내각에 들어온 여유당전서에 목민심서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기억한다. (여유당집이 아니라 여유당전서이다.) 당시 부본이 없어서 내각의 목민심서를 열람하지 못한 그는 후일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자 대구 감영에서 이 책을 간행하려 했는데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 후 광문사라는 출판사가 설립된 후 정약용의 후학을 자처하는 양재건과 현채의 교열에 의해 목민심서가 공간되었다. 황성신문 논설은 이를 기념한 것이다.

공간된 목민심서는 여타 필사본과 다른 권위 있는 정본으로서 가치가 있음을 이렇게 제시하였다. 일단 남포 수령 이인승의 가장본을 저본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다산초당 시절 정약용 문하에 출입한 해남의 윤종수 필사본으로 정약용이 평정(評定)을 가해서 권위가 있었다. (윤종수의 종손 윤주찬은 호남학회에서 활동하는데 다산학단과 대한제국 학회운동은 연구 과제이다.) 간행 작업에 들어간 후 다시 정약용 가장본을 얻었는데 이것은 윤종수 필사본과 장황이 동일하고 다만 다소 내용이 증보된 형태였다. 이에 사고전서 보유와 습유의 관례를 따라 신간의 편말에 이를 보유했다. 목민심서 간행에 사고전서를 참조하는 세상이 오다니 재미있다.

광문사 목민심서가 출판된 지 두 해 지나 러일전쟁 기간 이번엔 박문사 목민심서가 출판되었다. 박문사 목민심서는 목민심서 정문(正文)만 취해 간행된 것으로 이번에는 양재건과 김우식의 교열에 힘입어 세상에 나왔다. 이미 광문사 목민심서가 있는데 다시 정문만 취해 간행하는 수고를 기울여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김우식은 광문사 목민심서가 간행되자 즉시 이를 구입했는데 책의 간행에서 그치지 말고 학습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우식은 목민심서를 활용한 관리 교육을 구상하였다. 여기에 적합한 날씬한 목민심서가 곧 목민심서 정문이었다. 그는 목민심서를 학습하지 않은 사람은 수령에 임명하지 말자[不講牧民心書者毋得補守令論]는 논의를 내서 내부대신 이도재에게 상서했다. 황성신문은 김우식의 이 상서를 소개하면서 그 골자를 목민학교의 설립과 관리 교육으로 요약했다. 만일 이 상서가 채택되었다면 고을 수령 사관학교로 목민학교라는 이름이 길이 길이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목민심서 전문 교육 기관 목민학교가 설립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만약 그랬다면 수많은 영혼이 목민심서를 달달달 외우면서 목민의 마음이 아니라 목민의 기술을 익혔을지 모른다. 조긍섭(1873~1933)이 지적했듯 목민심서는 혹독한 관리를 만들 위험이 있는 책이었다. 더구나 목민심서 사관학교 졸업자가 관료 사회에서 엘리트를 형성하여 심지어 목민회(?)가 결성되면 이 파벌이 한국 정치를 좌우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목민심서와 대한제국 관리. 목민심서의 근대사에서 치솟은 이 토픽은 다시 해방 후에도 이어진다. 목민심서와 대한민국 관리가 그것이다. 목민심서의 대한민국에서 중요한 시기는 1970년대이다. 정부 공직자의 부정부패 문제가 빈출하자 박정희는 1973년 재무부 및 국세청, 조달청, 관세청 등의 공무원을 대상으로 목민심서의 명언을 훈시했다. 『지방행정』에는 ‘나는 목민심서를 이렇게 읽었다’(김현옥, 1972)가 연재되기도 했다. 『목민심서와 공직자의 윤리』(안갑준, 1977)도 목민심서 신드롬의 산물이었다. 경향신문 칼럼 ‘목민유감’은 국민을 가축으로 보는 목민이라는 말이 현대 사회에 버젓이 쓰인다고 개탄했다. 관제 목민정신에 대한 우려였다.

목민심서 독서의 추동력은 1969년에 나왔다. 이 해 잡지 신동아의 별책부록 『한국의 고전 백선』과 출판사 현암사의 『한국의 명저』에 목민심서가 들어갔고 민족문화추진회도 목민심서 번역본을 냈다. 1975년 가을부터 다산연구회는 목민심서를 강독하고 그 성과를 차례로 『역주 목민심서』에 담아냈다. 정약용 서거 150주기의 이정표가 되었다.(1985년 완간) ‘다산을 사랑하는 수원시 공무원 모임’은 2012년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이해 『대한민국 목민심서』를 출간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고을 수령의 책이라면 『대한민국 목민심서』는 시·군 과장의 책이었다. 무엇보다 현직 공무원 사회의 자발적인 목민정신이었다.

목민심서의 근현대사. 그 역사의 궤적에서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목민심서란 무엇인가. 실용 행정서인가? 인문 고전인가? 이를 위해 서두에서 말한 황성신문 논설을 소개할 때가 되었다. 대한제국 사람은 왜 조선의 목민심서를 읽어야 하는가? 논설은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 세상에는 서양 신법에 매몰된 개화와 중국 고법에 집착하는 완고의 두 부류가 있는데 둘 다 ‘허담(虛談)’이다. 이제는 동서고금을 절충해 한국의 문물을 만들고 한국의 법도를 실행해야 한다. 만국 교통의 이 시대에 목민심서는 진정 한국 정치학의 신서이다.

이것은 목민심서의 문명사적 독법이다. 목민심서는 ‘한국 정치학’의 새 책이라는 것. 한국 정치학도 문명사의 분과 학문이다. 어쩌면 이 감각을 얻기 위해 정치학의 세계사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푸코의 통치성 개념으로 목민심서의 정치학을 통찰하면 어떨까, 목민심서를 근대 유럽의 통치술 도서와 비교하면 어떨까.(김선경, 목민심서 연구, 2012) 목민심서의 근현대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노관범(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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