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서 칼럼] “이재용 회장에게 스포츠의 ‘스’자도 꺼낼 수 없는 분위기다.”
얼마 전 삼성 내부 사정에 정통한 지인에게서 들은 말이다. 삼성의 프로 스포츠 구단들이 한결같이 꼴찌에서 헤매는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려면 이 회장이 직접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에 대한 답변이었다. 모두가 스포츠 문제에는 조심스러워하는 상황인데다, 그러한 건의를 이 회장에게 할 만한 사람이 내부에는 없다고 단언했다.
이유는 짐작대로였다. 최순실 딸 정유라에게 승마 지원을 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이 회장은 이 문제를 포함한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징역 2년6개월을 확정 판결 받았고, 1년7개월을 복역했다.
삼성은 승마와 인연이 깊다. 1986년 승마단을 창단한 이후 2010년 해체하기까지 한국 승마 발전에 두루 기여를 했다. 소속 선수단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따낸 메달만 15개다. 이재용 회장도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승마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국제대회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냈다. 승마단 해체 이후에도 삼성은 한 동안 승마협회 회장사를 맡았다.
그런데도 승마 지원이 결정적 이유가 돼 상당 기간 복역까지 했으니 그 원통함과 배신감이 오죽하겠느냐고 주변에서는 얘기하고 있다. 이 회장 스스로가 이와 관련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도 없고, 삼성 스포츠단에 대한 생각을 언론에 밝힌 적도 없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이에 따라 이심전심으로 눈치보기를 하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마냥 뭉개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팬들의 인내심은 거의 ‘임계점’에 다다랐을 만큼 폭발 직전이라고 한다. 시즌이 한창인 프로 야구와 축구는 리그 최하위에서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배구와 남자농구도 꼴찌로 시즌을 마감했다. “야구, 축구, 배구, 농구. 전 종목 그랜드슬램 달성”이라는 비아냥이 삼성 프로스포츠의 현주소를 함축한다.
프로축구는 2부 리그 추락 유력…제일기획 관리 맡으며 내리막길
이들 종목 중에서도 축구팀 수원삼성 블루윙즈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다. 수원삼성은 21일 현재 K리그1 12개 팀 가운데 3승6무14패의 성적으로 최하위다. 꼴찌는 다음 시즌에는 2부 리그인 K리그2로 자동 강등된다. 11위는 K리그2와 승강 플레이오프를 벌여 패배하면 2부 리그로 간다. 지금과 같은 추세로는 강등이 유력시된다는 것이 다수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돼 ‘레알수원’이라고도 불렸던 ‘거함’이 1부 리그에서 침몰하는 사태는 프로축구에서 가장 충성스럽다는 열성팬들에겐 인정하기 어려운 악몽일 수밖에 없다.
삼성 스포츠는 2014년부터 관리 주체가 홍보기획대행사인 제일기획으로 바뀌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프로구단이라는 성격에 맞게 전문성과 자생력을 키우겠다는 의도에서 내린 조치였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 등 그 전까지 ‘우승’을 위해 ‘묻지 마’식으로 운영비를 대주던 모기업들은 후원금 형식으로 구단을 도왔다.
하지만 말 그대로 후원금이다보니 규모는 종전보다 크게 줄었고, 구단 예산도 자연히 쪼그라들었다. 축구팀 수원삼성의 경우 연간 운영비는 300억원대였지만 200억원대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렇다고 관리 주체인 제일기획이 부족분을 메워줄 만한 여력은 없었다. 예산을 줄이다보니 팀마다 좋은 선수를 붙잡을 수도, 데려올 수도 없었고, 그러면서 성적은 곤두박질을 쳤다. 정상에서 호령하던 과거 영광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지 오래다.
관리 주체 변경에는 이재용 회장의 경영전략이 작용했다고 한다. 투자를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실리주의’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 팀의 경쟁력 유지와 강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는 성급했다. 우리 프로스포츠 환경에서 자생적 운영은 여전히 시기상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프로구단의 자립은 기본적으로 비싼 입장료, 고가의 광고료와 중계료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일등주의’가 상징인 삼성이라 하더라도 스포츠 종목에서 늘상 정상에 머무는 것이 그저 반길 일만은 아닐 수 있다. 경쟁팀 팬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질시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고, 이 점이 빌미가 돼 정치적 표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정상급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스포츠 팀 운영으로 거둘 실익이 별로 없다는 견해도 있다. 해외 마케팅 효과가 필요하다면 과거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 구단 유니폼에 삼성 로고를 넣었던 방식의 스폰서 계약을 맺으면 된다는 것이다.
“팬들은 삼성이라는 이유로 희망 가져…적극 지원 안하려면 깨끗이 접어야”
그렇지만 삼성 브랜드를 앞세운 국내 대표적 프로팀들이 너나없이 죽을 쑤고 있는 상황은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스포츠 팬들을 중심으로 삼성하면 ‘최고’ ‘일류’ 등 이미지가 아닌 ‘꼴찌’ ‘이류’ ‘패배주의’를 떠올린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반도체 등 주력 종목의 부진을 이러한 이미지와 연관시켜 힐난하기로 한다. 다만 스포츠단 내부적으로는 운영 방식을 과거로 환원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한다. 이재용 회장에게 이를 어떻게 건의할 지가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초일류 삼성’에 매진했던 고 이건희 회장은 1995년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당시 돈으로 500억원어치 무선전화를 소각하는 ‘화형식’을 가졌다. 제품 중 불량품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시중에 판매한 15만대 모두를 회수해 불태워버린 것이다. 현실에 안주한 삼성의 생산 현장을 환골탈태 시킨 충격적 사건이었다.
무기력증에 빠져 불량 조짐이 뚜렷한 스포츠 팀을 방치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삼성답지 않다. “삼성이기 때문에 좋아질 것”이라고 희망을 거는 팬들에게도 도리가 아니다. 삼성의 위상에 걸맞게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는 쪽으로 일단은 충분한 투자와 지원을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렇지가 않다면 우량한 인수 희망자에게 넘기고 ‘화형식’을 치르듯 깨끗이 접는 게 순리일 것이다. 최근들이 ‘소통 활성화’를 강조하는 삼성에서 스포츠의 ‘스’자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라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법은 이재용 회장에게 달렸다고 한다. 결단을 기대한다.
<필자 소개>
-서울이코노미뉴스 부회장
-전 서울이코노미뉴스 대표, 주필
-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
-전 서울신문 편집담당 상무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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