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태 칼럼] 지난 글에서 보았듯, 1708년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은 서양식 세계지도와 천문도를 명나라의 숭고한 유산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관상감의 시헌력(時憲曆) 학습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했다.
명나라 말 숭정(崇禎) 황제의 후원 아래 서광계(徐光啟)와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제작된 역법이 청나라에 의해 시헌력이라는 이름으로 채택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오랑캐” 청나라 과학의 도입이 실은 숭명(崇明) 이념의 숭고한 실천일 수 있다는 최석정의 승인은 이후 조선에서 서양 과학 수용의 주요 정당화 논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숭명 사상이 단지 시헌력 학습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포장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숭명 사상과 서양 과학의 결합은 구체적인 내용을 지닌 과학적 기획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8세기 중엽 서명응(徐命膺) · 서호수(徐浩修) 부자의 천문학 개혁 프로그램을 들 수 있다.
서명응은 영조 36(1760)년 12월 8일의 경연(經筵)에서 명나라 말에 제작된 “숭정역법(崇禎曆法)”이 실은 옛 요순(堯舜) 임금의 천문학을 되살린 것으로서 명나라의 문화적 계승자인 조선에 이를 온전히 구현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제안의 핵심은 성(省)별로 주야 · 절기 시각을 밝힘으로써 제국 전역을 천문학적으로 포괄한 청나라의 시헌력처럼 조선 군주가 발행하는 달력에도 팔도(八道)의 주야 · 절기 시각이 모두 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 조선의 달력은 서울 지역의 천문 현상만을 반영함으로써 왕국 전체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서명응의 제안은 시헌력을 중화(中華)의 유산으로 본 50여 년 전 최석정의 구도를 계승하면서도, 이를 이념적 · 과학적으로 더 정교하고 더 구체적인 내용을 지닌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최석정의 경우 마테오 리치의 지도를 명나라와 고대 중국의 문화적 유산으로 본 근거는 지도에 기재된 “대명일통(大明一統)” 네 글자 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서명응은 시헌력을 요순 임금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는, 경학적(經學的) · 과학적으로 더 분명한 증거를 제시했다.
서명응에 의하면, 이전 중국 왕조의 역법과는 달리 각 성(省)의 주야 · 절기 시각을 밝힌 시헌력이야말로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기록된바 천문학자 희화씨(羲和氏)를 사방에 파견하여 천문 현상을 관측하게 한 요 임금의 기획을 복원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적 메시지는 분명했다.
만약 영조가 요 임금의 정치를 실천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면, 그 이상을 구현한 시헌력의 프로그램 또한 조선에서 온전히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명응은 영조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천하의 동쪽 모퉁이(조선)에 황명(皇明)의 예악 문물이 깃들어 있는데, 어찌 (요전(堯典)의) ‘삼가 백성에게 시간을 알려준다[敬授]’는 한 가지 일만 빠질 수 있겠습니까?” (『승정원일기』 영조 36년 12월 8일)』
서명응의 제안은 10년 뒤인 1770년 그의 아들 서호수가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상위고(象緯考)”에서 체계화되어 1780-90년대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일이 시작되던 1770년 초여름, 명나라 말에 제작되어 조선에 전해진 평면 해시계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가 창덕궁 홍문관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마도 서호수에 의해) 알려졌다.
좌우 여백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숭정 9년 병자년(1636), 서광계(徐光啟)의 후계자 이천경(李天經)의 감독하에 예수회사 아담 샬과 로(Giacomo Rho, 羅雅谷)가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그림 1).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에 “시헌력의 신법에 따라” 제작된 이 의미심장한 명나라 유물이 그동안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방치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안히 여긴 영조는 궐 밖 관상감에 층석(層石)을 설치한 뒤 안치하라고 명령했다(『승정원일기』 영조 46년 4월 20일).
흥미롭게도 이 해 시계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는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같은 이름, 같은 디자인의 해시계 유물이 하나 더 있다. 중요한 차이라면, 1713년 청나라의 천문학자 하국주(何國柱)가 측정한 서울의 북극고도 값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그림 2).
이 해시계는 여러 사료에서 정조 13(1789)년 관상감의 김영(金泳)이 제작했다고 기록된 바로 그 기구로 보이며, 그렇다면 거기에 새겨진 한양 북극고도 수치는 시헌력을 조선에 온전히 구현하겠다는 서명응 · 서호수 부자의 기획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호수와 관상감이 명나라 해시계의 조선 버전을 제작한 것은 그들이 명나라 말 서광계(이천경)와 아담 샬이 창안한 천문학의 계승자라는 선언과 같았다.
1790년의 연행(燕行) 도중에 마테오 리치의 묘에 들른 서호수는 아예 자신을 그 서양 신부의 과학적 계승자라고 공공연히 선언했는데, 18세기 조선에 형성된 서양과학과 숭명 이념 사이의 단단한 연대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숭명 이념이 18세기 후반 서양 천문학과 수학의 지적 유행을 뒷받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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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태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