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코노미뉴스 정진교 기자] “디딤돌 대출, 버팀목 대출, 보금자리론, 국민행복기금 등 멋진 이름들이 즐비하지만 이름값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전국퇴직금융인협회(회장 안기천)는 "서민에게 따뜻해야 할 햇살론도 금리가 높다 보니 차가운 ‘학살론’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다. 그럴수록 이름과 실상이 서로 꼭 맞는 정책으로 ‘살리는’ 금융, ‘이기는’ 금융을 주어진 소명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며 정책금융의 높은 금리를 대폭 낮출 것을 긴급 제안했다.
이 협회 부설 금융시장연구원은 10일 정책금융 금리 운용과 개선방안'을 발표, 서민과 자영업자 등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정책금융지원상품의 금리가 너무 높아 부실률이 사상 최대로 치솟고 있다며 시급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실제로 소액생계비대출 연체율이 치솟고 있다.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서민금융진흥원에서 제출받은 ‘소액생계비대출 누적 대출 건수 및 대출금액’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3월 출시된 이 상품의 연체율이 그해 6월 말 2.0%에서 9월 말 8.0%, 12월 말 11.7%로 뛰었다. 올 3월 말에는 15.5%로 올랐다. 상품 출시 1년 만에 연체율이 16배 가까이 급등한 것이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연체율이 높게 나타났다. 만 19세를 포함한 20대 이하의 연체율은 21.1%, 30대의 연체율은 18.2%로 집계됐다. 50대(12.5%), 60대(9.9%)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수치다. 소액생계비대출은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의 문턱을 넘지 못한 저신용자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급전 창구다.
높은 연체의 근본 원인, 높은 금리
소액생계비대출은 신용평점 하위 20% 이하이면서 연 소득 3,500만 원 이하면 이용할 수 있다. 금리는 연 15.9%. 연체 없이 성실하게 상환하면 최저 연 9.9%까지 금리를 낮출 수 있다. 연체자도 대출이 가능하다. 1인당 대출한도는 최초 이용 시 최소 50만 원. 의료와 주거, 교육비 등 특정 용도의 경우 최초 100만 원 한도 내에서 이용할 수 있다. 1년 만기 일시상환이다.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이 상품은 애초부터 연체율이 높을 거라는 예상이 많았다. 그래도 월 1만 원도 채 안 되는 이자를 못 내 연체가 쌓이는 건 의외다. 민생경제가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다.
전국퇴직금융인협회는 연체율 증가가 소액생계비대출만의 현상이 아님에 주목한다. 정부가 취약계층과 소상공인을 지원하는 햇살론도 예외는 아니다. 대위변제율이 급증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다. 취약계층이 원리금 상환에 실패, 이들을 위한 금융상품이 빠르게 부실화하고 있다. 대위변제율은 대출받은 차주가 원금을 상환하지 못했을 때 보증한 정책기관이 은행에 대신 갚아준 금액의 비율이다.
서금원이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햇살론 대위변제율과 대위변제액’ 내용도 충격이다. 올해 1분기 햇살론15의 대위변제율이 22.7%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 21.3%에서 3개월 만에 1.4%포인트 상승했다. 햇살론15는 최저 신용자를 지원하는 정책금융으로 최대 2,000만 원까지 빌려준다.
소상공인대출 부실도 커지고 있다. 신용보증기금의 올해 1분기 소상공인 위탁보증 대위변제액이 1,200억 원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743억 원보다 38% 증가했고, 같은 기간 대위변제 건수도 4,974건에서 약 9,000건으로 45%가량 늘어났다. 이를 단순히 고금리와 고물가, 경기회복 둔화로 차주의 채무상환능력이 떨어진 것으로 보는 건 피상적 관찰에 불과하다고 전국퇴직금융인협회는 우려했다.
정책금융 고금리 운용, 재검토 시급
협회 금융시장연구원 보고서는 연체와 부실 증가의 근본 원인이 정책금융지원상품의 금리가 너무 높은 데 있다고 진단한다. 정책금융 금리가 일반 금융회사의 대출금리와 차이가 없어, 낮은 금리도 감당하기 힘들 서민과 소상공인이 무슨 수로 그 높은 이자를 감내할 수 없겠느냐고 반문한다. 부실이 클 것을 뻔히 알면서 높은 금리를 매겼다면 차주에게 대출금을 안 갚아도 된다는 묵시적 동의한 것일 수 있어 도덕적 해이에 해당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협회 금융브리핑 보고서는 정책금융의 본질과 취지에 맞는 금리 운용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저신용자에 대한 현행 고금리 구조를 재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정책금융은 시장경제 체제에서 자원이 골고루 배분되지 못하는 시장 실패가 발생한 개인과 산업을 지원하는 데 목적이 있고, 시장 실패가 일어나면 일반 금융회사가 대출 등 자금 공급을 꺼려 정부가 나서서 금리 인하나 보조금 지급 등 정책적으로 금융을 지원해야 한다는 논리다.
협회는 저신용자 정책금융에 높은 금리를 매겨 서민과 소상공인을 힘들게 하는 현실을 더는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뼈있게 지적했다. 금융을 지원한 후 차주가 어려워지면 이자환급, 저리 대환대출, 만기연장 등을 시행하는 일관성 결여도 아프게 꼬집는다.
처음부터 이자를 낮게 책정해야지, 높게 매겨 놓고 나중에 낮추거나 돌려주는 건 무원칙이라는 비판이다. 한 번에 쉽게 할 일을 여러 번에 걸쳐 어렵게 하는 비효율의 전형, 비능률의 극치로 격하게 표현한다.
협회 금융시장연구원장 권의종 박사는 “이왕 도울 거면 제대로 도와야 한다. 감당하기 힘든 지원은 도움이 아닌 부담으로 작용한다”며 고금리가 연체율을 높여 대량 부실로 이어지는 작금의 현실을 그 단적인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정책금융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붓고도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서민과 기업의 부실, 금융회사 손실 등 사회적·국가적 낭비 또한 막심하다. 게다가 정부는 이를 만회하고자 또 다른 정책을 쏟아내는 시행착오를 반복한다”며 아쉬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