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칼럼] 요즘 생중계되는 국회 청문회를 보면 습한 장마철 더운 날씨 만큼이나 짜증스럽고 답답하다. “그게 말이냐 막걸리냐~?” 그들을 바라보는 국민들 사이에 심심찮게 희화화(戱畵化)하는 대화다. 국민들의 보편적 시각에서, 분명 적어도 화자(話者)와 청자(聽者) 둘 중의 하나이상은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다. 이들 간의 주고받는 말싸움 감정싸움이 흥행을 넘어 국민을 패 갈림 회오리속으로 몰아 넣는 상황이다.
양측간 상대방의 말을 듣는 청문회(聽聞會)가 아니라 상대를 윽박지르거나 동문서답하면서 상대의 말을 배척(排斥)하는 척문회(斥聞會)로 변질되었다. 무모한 검투사(劍鬪士)들 간에 양보 없는 치킨게임처럼 결론 없는 공방전만 연출되고 있다. 만물의 영장, 지성적인 인간언어는 실종되고 고성과 기싸움판으로 변질된 오기(傲氣)와 몽니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정당법 제2조는, "정당"이라 함은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고 공직선거의 후보자를 추천 또는 지지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의 자발적 조직을 말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모든 정당정치행위가 '국민의 이익'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전제되어 있다. 국민의 이익과 정치집단의 이익이 상충되는 상황이라면 어떤 방향으로 우선순위가 정해져야 할지가 명확하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누구를 위한 청문회인가를 원점에서 영점(零點)을 바로잡기 바란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 그런데 정치의 기본수단인 말은 양날의 칼이다. 말은 이해의 통로인 동시에 오해의 지뢰밭이기 때문이다. 속으로 품은 감정, 은폐된 저의(底意)나 정제되지 않은 파편들이 말 속 곳곳에 숨어있다. 그 지뢰의 위력은 그를 심어놓은 사람이나 그를 밟는 사람이나 불문하고 치명적이다.
던져진 말에 휘둘리는 사람도 균형을 잃지만, 자기말에 자기가 발목 잡히는 사례도 요즘 너무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감정의 에너지가 이성의 힘을 압도하는 선거철에는 더더욱 그렇다. 평상시 그렇게 똑똑하고 치밀하며 이성적이었던 사람도 무언가 조급하게 되면 스스로 자기발을 찧는 실언을 절제하기가 쉽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국회청문회 보면 '짜증'...정치인의 수준도 그가 하는 말로 정해져
독버섯이나 독성식물은 영양분이 없어서 못 먹는 게 아니다. 그 속에 양질의 영양분이 있음에도 치명적인 독성이 섞여 있기 때문에 먹지 못한다. 숙취해독에 좋다는 해물 복어요리도, 독 성분 알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술독을 완화하는 해독제(解毒劑)가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치사제(致死劑)가 될 뿐이다. 우리가 하는 말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말은 글로 표현되었을 때와 입으로 표현할 때와는 그 의미와 전해지는 느낌이 천지차이다. 천사의 메시지를 전한다 해도 악감정을 실어서 전하면 코팅된 악마의 말일 뿐이다. 요리사는 근사한 음식을 만드는 것 보다 독이 없어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정치인의 수준도 그가 하는 말로 정해진다. 복어 알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방법을 모르고 서는 복어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없다면, 말을 지성인답게 구사할 줄 모르는 정치인을 국민을 대표하는 고비용 정치인의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독버섯이 식용버섯보다 그 겉모습은 오히려 윤곽이 뚜렷하고 더 근사하며 유혹적이다. 우리가 하는 말도 다르지 않다, 화려하고 근사한 말이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혹은 감정을 싫어 오물 투척하듯 던져버리는 해코지성 발언이 묻지마 극성지지자들에게는 인기가 있을지 몰라도, 그 말 속에 거짓이나 악감정이 섞여 있다면 먹을 수 없는 독버섯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분한 마음이 목에까지 차 있을 때 쓴 자신의 글을 그 다음날 잠자고 난 뒤에 읽어보라. 또 며칠 뒤 평정심을 되찾은 상태가 되었을 때 다시 읽어보라. 너무 졸렬하고 옹졸한 자기 감정이 표현되어 있음을 보게 되면서 그 글을 순화시켜 다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글을 감정대로 즉시 말로 토해버렸다고 생각해보라. 한 번 뱉어낸 말은 다시 주어 담을 수 없지 않은가? 아차 싶어 정정하려 해도, 이미 치명적인 독 오물은 완료형으로 투척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즉흥적으로 하는 애드립이나 절제되지 않은 감정의 언어가 상대는 물론 자신에게 얼마나 위험할 수 있겠는가?
말속 “악감정”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라야 원숙한 정치인
‘아’다르고 ‘어’다른 게 말이다. 글자 외에도 얼굴표정이나, 어떤 단어에 힘을 주어 강조한다 거나 특정인을 노려보며 말을 한다거나, 비웃음을 섞어서 말을 한다 거나 눈에 과도한 힘이 들어간다거나, 저주(詛呪)성 비아냥거림 등. 표현되는 모든 것들이 전달되는 의사표시의 구성요소다.
말에 대한 오해의 위험은 화자(話者) 뿐만 아니라, 청자(聽者)에게도 똑같이 작용한다. 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이해관계 속에서 선입견을 갖고 듣는 사람과, 선입견 없이 듣는 사람에게 전해지는 메시지의 충격은 전혀 다르다, 말로 표현된 언어보다 여타 다른 감정적인 요소들이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누구나 거울을 보지 않고 서는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처럼, 남들도 그렇게 보아줄 거라고 믿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같은 거울이라 할지라도 이해관계가 깊은 추종자들이나 그 반대진영의 사람들이 비춰주는 거울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적은 보통의 일반 국민들이 비춰주는 거울은 천지차이다.
말을 잘한다는 기준이 옛날과 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이 시대에, 위협적일만큼 앙칼지게 찌르는 목소리보다는 오히려 잔잔하면서도 논리적인 목소리가 더 감동을 불러오고 진실성이 느껴져 가슴에 새겨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비록 어눌해도, 오해할 소지가 없고, 외국어처럼 재해석이 필요 없는 말이라야 된다. 적어도 정치로 먹고 살고 있지 않은 일반 백성의 귀에는 분명히 그렇다.
말에 걸림이 없어야 득도(得道)한 사람이라고 할 만큼, 말속 “악감정”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라야 원숙한 정치인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몇 배나 더 많은 주의와 자기성찰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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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더뉴스24 주필
전 HCN지속협 대표회장
전 ㈜ 한림MS 기획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