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남의 에듀컬처] 파리올림픽 기간 내내 태극전사들이 청량제 같은 승전보를 전했다. 우리 선수들은 뛰어난 경기력은 물론 훌륭한 경기 매너로 대한민국의 품격과 위상을 높였다.
메달을 딴 10대와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은 승리를 만끽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다짐해 한국 체육의 미래를 기약했다. 비록 메달을 따진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노메달’ 선수들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아깝게 금메달을 놓쳤지만 의미 있고 값진 은·동메달도 이어졌다. 여자 유도 57㎏급에서 은메달을 딴 허미미 선수는 귀국 후 5대 할아버지 추모 기적비를 찾았다. 허미미 선수의 현조부는 독립운동가 허적 선생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중인 허미미 선수는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가대표로 나서 감동을 줬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은 승패와 관계 없이 상대 선수를 존중하는 훌륭한 매너를 보였다. 태권도 박태준은 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세리머니 대신 경기 중 부상당한 상대 선수를 위로했다. 탁구 개인전 여자단식에 나선 신유빈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 선수에게 패한 뒤 상대 선수를 안아주며 승리를 축하했다. 우리 선수들의 이 같은 모습은 상대 선수 국가의 언론과 SNS로 알려지면서 찬사를 받았다.
올림픽의 좌우명이 되고 있는 ‘승리보다 참가에 더 의의가 있다’는 말은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 당시 근대 올림픽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의 대회 연설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하지만 올림픽이 개인 간의 경쟁을 넘어, 국가 간의 경쟁이 된 지는 오래다.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거둔 또하나의 값진 성과는 ‘금메달 지상주의’에서 벗어난 우리 젊은 선수들의 성숙한 행동이었다. 화면에 나타난 대한민국 선수들은 누구 하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과거처럼 메달을 놓치고 나서 죄인이라도 된 듯 “국민에게 송구스럽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지든 이기든 얼굴에 미소를 지며 ‘참가가 목적’이라는 올림픽을 진정으로 즐기는 모습이었다. 어떤 선수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오히려 국민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른 선수는 앳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손 하트를 날리며 관중들에 감사함을 전했다.
이런 ‘즐기는 대한민국 선수’ 징조는 앞선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 때도 연출됐다. 탁구 혼합복식 시상식에서 한국의 두 선수가 3위 시상대에 올랐다. 시상대에서 남자선수 장우진이 여자선수 전지희의 목 뒤에 엉킨 메달 끈을 정리해줬다. 이 달콤한 모습에 중국 관중들이 환호했다.
잠시 부끄러워하던 우리 선수들은 ‘볼 하트’로 답례했다. 금·은메달을 딴 중국 선수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중국 누리꾼들은 ‘우리(중국) 선수들은 왜 한국 선수처럼 즐기지 못하나’라며 부러워했다. 이 영상은 전 세계에 널리 퍼지면서 꽤 오랫동안 화제가 됐다.
선수들이 즐기는 만큼이나 국민들의 반응도 크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올림픽에서 선수들을 메달로만 평가했다. 하지만 이번 파리올림픽에서는 선수들의 열정·땀과 눈물, 도전과 노력의 과정을 토닥여주고 큰 박수를 보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한 많은 선수를 격려했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메달이 아니라 선수가 흘린 땀방울에 존경을 보내고, 진정으로 즐기는 선수를 응원할 수준에 올랐다.
사실 패배를 인정하는 건 길게 볼 때 스스로를 위한 일이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펜싱 오상욱 선수가 그랬다. 그는 지난 도쿄올림픽 남자 사브르 8강에서 오심 논란 속에 1점을 손해 봐 석패했다. 그럼에도 그는 “오심이 아니라 불안해하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저 자신이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반성부터 했다.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인정한 게 결국 이번 파리 올림픽 2관왕 신화의 발판이 된 셈이다.
이처럼 경기에서 지고도 더 빛난 선수들은 감동을 준다. 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는 우리도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다. 이때 실패를 인정하고 결과를 수긍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여야 상처도 치유되고 미래도 도모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을 때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유독 정치에선 이처럼 인정하고 승복하는 문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물가와 집값이 들썩이는 가운데 티몬·위메프 사태와 경기침체 우려에 따른 증시 발작이 이어졌다. 자영업자들은 벼랑 끝이고 중동 확전도 일촉즉발 상황이다. 민관정이 머리를 맞대고 위기를 극복해야 할 때다. 그 시작은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 있다. 경제와 민생이 무너지면 모두 패자가 될 뿐이다. 포용과 화합의 올림픽 정신을 정치에서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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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조석남 (mansc@naver.com)
- 한국골프대 부총장
- 전 한국폴리텍대학 익산캠퍼스 학장
- 전 서울미디어그룹 상무이사·편집국장
- 전 스포츠조선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