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칼럼] 우리는 어떠한 현상이나 개념에 대해서 대칭적 사고를 하는데 너무도 익숙해 있다. 그것은 상대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켜서, 주장하는 바를 더욱 뚜렷하게, 또는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선명하게 표현하고 연출하는 전략이다.
최근 당직 선거를 치르면서 출마자들이 과다할 정도로 극단적인 연출로 득표의 효과를 기대했던 정치판과, 그칠 줄 모르는 여야의 극한 싸움에서 저돌적이고 무모한 말폭탄이 그 실증적 사례중의 하나다.
이러한 극단적 말싸움 대결은 언제 끝날 것인가? 또 그에 따른 부작용은 어떤 것일까? 결국 극단은 더 큰 극단을 부른다. 출구 없는 대립만이 강화될 수 밖에 없다. 죽느냐 사느냐 사생결단의 전투모드에서는 한 쪽이 죽거나 외세의 침략으로 공멸한 이후에나 끝난다. 당파싸움에 죽기 살기로 전념했던 조선이 외세를 불러들였던 어리석은 역사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대칭적 극단은 언제나 불변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남자와 여자의 대칭은 사람이라는 통합된 개념에서 사라진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대칭은 바다라는 통합된 영역에서 사라진다. 나와 너의 대칭은 우리라는 개념 속에 파묻힌다. 그러므로 대칭은 대비를 통해서 어떤 의사결정을 위해 임시로 사용되는 잠정적 구조다.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이 바다에 이르면 강(江)이라는 이름은 그냥 없는 것이다.
빛 입자는 있어도 그림자 입자는 없다. 그림자는 빛이 가려진, 실체 없는 개념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빛과 그림자를~, 보수와 진보를~, 음과 양을~, 밤과 낮을~, 마치 불변의 고정적 실체처럼 개념 지으며 이분법적 구조로 고착화 시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엄밀히, 보수도 진보되지 않은 채 지속되는 보수는 있을 수 없고, 어제의 진보도 변화된 오늘의 진보입장에서는 진보가 아니라 보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 극단은 권력쟁취를 위해 대결진영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정치인 이해관계에 따라 선거때마다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수시로 생겨났고, 표를 얻는다면 사상과 가치의 지향점은 포퓰리즘에 밀려 슬그머니 사라졌던 것이 그 실증적 증거다.
솔직히 우리의 정당 역사는 시대마다 힘센 정치인이 핵심코어가 되고 오너가 되어 그 문패에 이름 붙여진 사실을 인정해야 되는 것 아닐까? 그러한 마당에 공천에 줄이 닿는다면 극단적 돌출행동이 무슨 대수가 되며 부끄러운 충성경쟁쯤 이야 개인의 정치노선과 무슨 상관이랴?
어느 집단이든 갈등의 주범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獨善)과 극단의 고정관념
세상이 아무리 변화를 원한다 할지라도, 정치인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지금 붙잡고 있는 사적 이해관계가 그들 정치의 뒷배이며, 이러한 현실정치가 그들의 직업이고 생업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정치인이 현상태에서 순간 대오각성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정치가 아니라 생업이 따로 있는 유권자 국민은 고착된 대립감정이 완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민심마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지금 내 생각과 행동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또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수시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유권자부터 극단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정치인의 판도는 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극단의 이름이 있더라도, 표(票)와 돈을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은 없기 때문이다. 표의 방향과 돈의 흐름이 정치의 판도다.
이제 극단에 대한 국민적 인식교정이 필요한 때가 왔다. 대립적 이해가 아니라 보완적 배경으로 그 극단의 의미를 한정시켜야 한다. 악은 선의 방향성을 정하게 하는 배경으로, 보수는 진보의 방향성을 정하게 하는 배경으로, 어둠은 빛의 방향성을 정하는 배경으로만 존재할 때 라야 그 의미가 있음을 이해한다면, 극단은 파괴를 위한 대칭적 사고가 아니라 발전을 위한 보완적 사고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극단의 구도속에서 재미를 본 정치인의 변화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극단의 대칭적 프레임 속에서 쉽게 흥분되고 쉽게 갈등하는 사람들의 불 같은 감성을 이용하여 득을 본 향수의 유혹을 쉽게 떨쳐내기 어렵기에 그렇다.
선악(善惡)을 구미에 맞게 설정하고 갈등구조를 만들어서 대중을 흥분 시키고, 그래야 그 무리들을 줄 세워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음을 기성 정치인은 잘 알고 있다. 정치인 개별 입장에 따라서는 겉으로 소통과 타협을 말하면서도 속내는 극단적 분열을 원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집단이든 갈등의 주범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獨善)과 극단의 고정관념이다. 나를 가두는 가장 견고한 감옥도 내 안에 굳어버린 고정관념이다. 강화석처럼 굳어져버린 아집은 물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불에도 타지 않는다.
그래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기를 고집하기에 난공불락(難攻不落)의 감옥이다. 항아리 속에서 나와야 항아리 모습이 보이듯, 세상을 보는 안목이 유연해져야, 나와 세상을 편견이 아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소통은 시작되고, 감옥의 문은 열리기 시작될 것이다.
정치인 자신을 포함한 이 땅의 갈등을 진실로 애통해 한다면, 대립된 극단 속에서 갈라치기 당하는 백성을 진정 긍휼히 여긴다면, 극단의 무대에서 눈에 독기를 품을 게 아니라, 참회의 눈물 로라도 그 독기를 녹여야 하지 않을까?
상반된 극단 속에서 철옹성처럼 견고하게 편향, 변질된 관념과 느낌에서 탈출해야
그래야 극단이 극단을 부르는 악순환이 종결되는 쪽으로 가지 않겠는가? 아무리 정치가 생업이라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대한민국의 사실상 국시이자 법률상 교육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함)가치에 대한 철학을 소유하시기를 정치인들께 요구드린다.
철학적 사고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을 통해 체계화 되었지만, 끊임없이 변화되는 세상을 기존 이론이 다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립되고 있는 양면의 반쪽 진리가 그때 그때마다 인간이 처한 환경과 처지에 따라 그 쓰임새나 효용성이 달라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문제는 인간 삶의 실체를 분석하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해서 나온 사상이나 이념체계를 명분삼아 오히려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고 긴장의 감옥에 스스로 갇혀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반된 극단 속에서 철옹성처럼 견고하게 편향되고 변질된 관념과 느낌에서 탈출해야 한다. 내가 선(善)이라고 믿고 고집하는 생각의 틀과 나를 둘러싼 환경을 선입견을 배제해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겠다는 결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색안경을 벗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경향성과 팩트를 각색없이 인정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기를 권한다.
세상은 지금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변하고 있다는 사실, 인간의 고집은 변하기 싫어한다는 사실, 인간의 본능은 편한 쪽으로 기울어 진다는 사실, 인간의 고귀한 생각도 보이는 실존의 환경과 토대가 무너지면 함께 무너진다는 사실, 옳고 그름을 재단하는 생각이 집단화하면 본래 목적은 사라지고 네 편 아니면 내편, 진영논리로 굳어져버리고 만다는 사실 등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겠다.
그 때부터 우리는 극단이 극단을 부르는 우(愚)를 줄일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지평이 넓어 질수록, 내가 모르고 있는 진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상대의 말에도 귀를 열 수 있다. 편견과 오만의 안경을 벗어버리자. 너 나 할 것없이 지금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싸우고 있는 닭싸움장 안에서 벗어나 보자. 하수(下手)는 꿈속에서 문제를 풀려 하지만 고수(高手)는 꿈에서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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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더뉴스24 주필
전 HCN지속협 대표회장
전 ㈜ 한림MS 기획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