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남의 에듀컬처] 이상기후 시대, 추석 연휴까지 이어졌던 이례적인 폭염이 마침내 수그러들었다. 이변은 있었지만 자연의 순리는 역시 거스를 수 없다. 그렇게 철이 바뀌었다. 10월 들어 하늘빛은 한층 푸르러지고, 한낮의 열기도 가라앉았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숨결에 가을 냄새가 물씬하다.
뒤를 돌아보는 여유가 생기면서 지난날과 그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이 계절…. 이때쯤이면 ‘가을 편지’ 한 자락이 생각나야 제격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언제부턴가 우리는 ‘손 편지’를 잊은 시대를 살고 있다.
가을은 편지와 궁합이 잘 맞는 계절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가을 편지’)은 이미 가을 노래의 대명사가 됐다. 군산 출신 고은의 시에 익산 출신 김민기가 곡을 붙였다.
편지가 e메일로 대체되는 시대에도 편지 노래가 이어졌다. 김광진의 ‘편지’와 아이유의 ‘밤 편지’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보낼게요. 사랑한다는 말이에요’라고 속삭이는 아이유의 노래는 마치 ‘손 편지’ 같은 아날로그적 감성이 충만하다.
‘가을 편지’의 시인 고은의 고향인 전북 군산시는 지난 9월 27일과 28일 시내 우체국 앞 우체통거리에서 ‘제7회 손편지 축제’를 열었다. ‘행운’을 주제로 마음을 전달하는 손편지 쓰기, 1년 후 받는 느린 엽서 쓰기, 나만의 우표 만들기, 우체통 그리기, 우체부 체험 등의 행사를 진행했다.
우정사업본부에 따르면 ‘보통우편물’은 매년 감소세다. 문서·편지 등이 디지털화한 영향이다. 보통우편 중에서도 ‘손 편지’는 극소수라고 한다. 우정사업본부는 학생들에게 ‘편지 쓰기’를 장려하고 있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감수성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다.
‘손 편지’는 중요한 소통수단이었다. 편지봉투를 뜯을 때의 셀렘과 정성을 담아 꼭꼭 눌러쓴 글귀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디지털 매체에서는 절대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편지지를 찢어가며 한 문장을 몇번씩 다시 쓰고, 감명 깊게 읽은 책의 한 구절을 베껴오기도 했다.
디지털 시대, 그런 ‘손 편지’가 모습을 감췄다. ‘손 편지’뿐 아니라 필기구로 종이에 글을 쓰는 ‘아날로그 글쓰기’가 사라지고 있다. 우리 교육현장에서는 지금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을 목전에 두고 ‘종이 교과서’와의 작별을 준비하고 있다. 교실을 기억할 때 떠올랐던 책과 공책·연필이 추억 속으로 사라질 날이 머지 않았다.
아무리 AI가 더 많은 편리함과 교육의 효과를 높인다 하더라도 교육현장에서 종이책을 통한 수업과 손 글씨 연습, 책 읽기 교육이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여러 가지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만 우선 학교에서 태블릿PC를 보거나 키보드를 사용하는 시간, 온라인 검색하는 시간을 줄여 활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교육현장에 정책적으로 반영한다면 문해력을 비롯한 학생들의 학습능력은 더욱 향상될 것이다. 학생들 스스로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기 전에 종이책을 읽고, 바른 글쓰기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문장을 정확히 알아야 할 단계의 학생들이 몇 줄의 문자와 이모티콘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학생들은 긴 문장을 쓰지 않고, 긴 글을 읽는 것 역시 부담스러워한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은 문장으로 된 책은 아예 외면하는 눈치다. 이런 사회현상인데 ‘손 편지’를 기대한다는 건 지나친 욕심일지 모르지만, 누군가를 배려하고 챙기는 부지런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에 더욱 절실해진다. 편지지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울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기다려진다.
‘마음의 꽃’ 편지는 닫혔던 세상을 녹이는 희망이 된다. 짤막해도 친필로 전하는 메시지는 큰 격려가 된다. 고된 직장생활에 지친 아빠에게, 온 몸에 성한 데가 없으면서도 자식만을 걱정하시는 엄마에게, 오랫동안 못 뵌 스승님께, 마음을 열지 못했던 친구·선후배에게, 사랑하는 마음만은 꼭 전하고 싶은 연인에게 이 가을, 한 통의 ‘손 편지’를 보내보자.
이번 가을은 ‘독서의 계절’ 만이 아니라 ‘편지의 계절’이었으면 좋겠다. 못 쓰는 글씨이면 어떤가. 맞춤법·철자가 좀 틀리고, 문장이 더러 꼬이면 어떤가. 정성이 가득 담긴 ‘손 편지’라면 받는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만큼 더 풍요롭고,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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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조석남 (mansc@naver.com)
- 한국골프과학기술대 부총장
- 전 한국폴리텍대학 익산캠퍼스 학장
- 전 서울미디어그룹 상무이사·편집국장
- 전 스포츠조선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