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과 바이든 그리고 박근혜
시진핑과 바이든 그리고 박근혜
  • 정종석 <발행인>
  • 승인 2014.07.05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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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단골메뉴 '血盟카드' 중국 제시..明淸 교체기 戰亂교훈 새겨야

 
필자는 짧지만 홍콩에서 1년 동안 중국어 연수를 했으며, 베이징에서 신문사 특파원 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 가끔 중국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중국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중국 외교관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중국이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도 한반도 특히 한국을 중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관심을 넘어서 지정학적으로 한국과 중국 간의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의대수란 ‘옷의 띠만큼 좁은 강’이라는 뜻이다. 강폭이 좁음을 비유한 말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나라’를 의미한다. 중국 지도자들은 “성문(한반도)에서 불이 나면 성(중국)이 위험하다“고 한반도 분쟁이나 북핵문제의 위험성을 애써 경고하기도 한다.
 
그들이 말한 내용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역사적으로 3,000년 양국관계를 볼 때 한반도에서 사단이나 변고가 일어나면 중국대륙에 왕조교체나 정변이 일어나는 등 뭔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대목이다.
 
이를테면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다가 실패한 끝에 멸망하고 당나라가 탄생했다..당나라 때는 신라와 나당 (羅唐)연합군을 결성해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광활한 요동과 만주 일대를 차지했다..임진왜란 때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명군(明軍)이 참전을 했다가 종전 후 국력이 쇠약해지는 바람에 후금의 침략을 받고 청나라가 들어섰다..남북한이 동족상잔을 벌인 6.25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해 세계 최강 미국과 국운을 걸고 건곤일척의 전쟁을 했다..등등
 
듣고 보니 변방에 불과한 한반도가 중국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면적으로 따지면 한반도는 지금 중국 전체 국토의 50분의 1, 한국은 100분의 1 정도 밖에 안된다. 그들 스스로 중화(中華)를 자처하고 우리를 동이(東夷,동쪽 오랑캐)란 표현으로 깔보지 않았던가.
 
지난 4일 우연히 TV방송을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방한 중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서울대 특별 강연 내용 때문이었다.
 
이날 강연에서 시 주석은 지난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을 언급했다. 그는 “400여년 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도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등자룡(鄧子龍) 장군이 함께 전사했다”며 “역사상 위태로운 일이 벌어질 때마다 양국은 서로 돕고 고통을 함께 했다”고 강조한 대목이다.
 
그는 한중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연설을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미담(美談)은 얼마든지 있다"면서 중국에서 입적했던 신라 왕족 출신의 김교각, 당나라에서 벼슬을 했던 최치원, 중국에서 27년 동안 독립운동을 했던 김구,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만든 정율성 등 역사 속 인물들을 거명했다. 그는 "(양국은) 수천 년을 걸쳐 누구보다 두터운 정을 쌓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필자의 귀에는 다른 평범한 역사적 교류의 사실보다도 임진왜란 때 조명(朝明) 엽합군이 왜적을 격퇴했다는 사실을 그가 한국에 와서 언급한 것이 유독 큰소리로 들려왔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우리나라 대학을 방문해 연설한 것도 처음이지만 그 내용 가운데 한중이 ‘혈맹(血盟)관계’였다는 표현을 쓴 것은 아마도 처음인 듯 싶다.
 
6.25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에게 혈맹이란 으레 한미동맹을 말하는 것으로 익숙하다. 그 때 중국은 침략자인 북한을 지원했다. 수십 만의 중국군대를 북한으로 들여보내 인해전술로 김일성을 지켜줬다. 압록강까지 진격해 통일을 눈앞에 뒀던  국군과 미군은 통한의 피눈물을 삼킨 채 최악의 '1.4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한반도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런 한중관계에서 시 주석은 돌연 이번 방한에서 듣기에 생소한 '임진왜란 카드'를 불쑥 꺼내들었다.
 
임진왜란이 어떤 전쟁인가. 지난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 까지 7년 동안(정유재란 포함)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고, 결과적으로 일본과 청나라의 왕조교체 등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시 주석은 "20세기 상반기에 야만적인 침략 전쟁이 벌어지고 대일(對日) 항쟁이 가장 치열했을 때 (양국은) 생사를 같이하고 서로 도왔다"고 했다. 또 '의리(義理)'를 애써 강조했다. 그는 "중화 민족은 의리를 바탕으로 산다. 군자는 의(義)를 바탕으로 삼는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일본 아베 정권의 우경화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한중간 공동 대응의 필요성을 환기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골똘히 연구한 끝에 15세기 임진왜란과 20세기 대일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기로 하고, 이를 '비장의 카드'로 삼아 방한했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지난 해 12월 방한했던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바이든이 “나는 (한국이)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건 좋은 베팅이 아니다(It's never been a good bet to bet against America)고 말해왔다. 미국은 계속 한국에 베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누가 봐도 당연히 박근혜 정부의 중국을 중시한 외교자세를 견제한 발언이었다.
 
과거보다 한국이 중국과 밀착하면서 상대적으로 미국과는 거리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미국 내 일각의 인식이 깔려 있다. 바이든의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지 말라"라는 표현을 축약하면 박 대통령에게 "반미(反美)하지 말라"는 뜻이 된다,
 
냉전 이후에 미국 세력권 안에서 반미하는 대통령은 대부분 제거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섬뜩한 외교적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한국과 중국이 가까워지는 것을 용납치 않겠다는 일종의 외교적 ‘협박’일 수도 있다. 독립국가의 외교주권을 무시한 바이든의 언사는 한국인인 필자에게도 무례하고 불쾌한 느낌을 갖게 한다.
 
남북한과 주변 4강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얽혀있는 한반도 주변에서는 지금 월드컵 ‘죽음의조’ 경기와 비슷한 절체절명의 '서바이벌 게임'이 벌어지는 인상이다. 한국 최남단 이어도 주변과 센카쿠 열도를 포함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는 한 중 일 3국의 과거사-영토 갈등에다, 항공식별구역을 둘러싼 3국의 분쟁에 미국까지 끼어들면서, 범상치 않은 위기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한미일 3국이 같은 ‘안보 우산’을 쓴 채 미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이 각각 한편이 되고, 여기에 일본이 북한에 추파를 던지는 복잡한 고등수학 게임이 벌어지는 양상이다. 월드컵으로 치면 16강 진출을 위해 같은 편끼리 서로 유-불리를 따져 이기고 져주는 복잡한 게임이 연출되는 셈이다.
 
한국은 이제까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는 다소 애매한 입장으로 두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좇아 왔다. 바이든의 ‘베팅론(論)‘은 미국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지난 4월 방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늘리고 건설적 관계를 맺는 건 환영할 일”이라면서도 "다만 한국의 안보와 번영의 기초는 미국”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바이든 ‘베팅’발언의 연장선이다.
 
특히 ‘혈맹’과 ‘의리’라는 개념은 그동안 불과 60여년 전 일어난 6.25 한국전쟁을 상기하며 미국이 한국을 달래는 단골 카드였으나 이제 중국까지 무려 400여년 전 임진왜란 때 조명 연합군이 참전하고 지난 세기 공동으로 대일 항쟁을 한 것을 고리로 우리에게 내미는 '회심의 카드'가 되고 있다.
 
한미,한중 간의 ‘혈맹’과 ‘의리’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각축전이 이 시대에 과연 뭘 말하는 지 이제 선택의 공은 박 대통령에게로 넘어왔다. 박 대통령이 줄곧 강조하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게 뭔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가 어디에 있는 지를 이제 민족사적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이른바 '내우외환'의 국면이다. 국내에선 국력을 소모하는 해묵은 정쟁과 갈등으로 날을 새고 있고, 주변 강대국들은  우리를 '먹이감'으로 끌어들이려고 혈안이 돼 있다.  박 대통령은 내부의 환부를 어떻게 치유하고 대승적으로 풀어 나갈 지를 다시 정리한 다음 이를 주변4강 외교에 새롭게 접목시킬 때가 됐다.
 
임진왜란 후 명-청 왕조 교체기에 조선은 쉬운 말로 신-구 중국 사이에서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정묘-병자 양대 호란을 겪고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참화와 피해, 수치의 역사를 기록한다. 그리고 불과 100여년전 19세기말 서세동점(西勢東漸)시기의 안타까운 구한말 역사를 보자. 지금  누군들 이 시대의 한반도 주변정세가 그때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좋은 말로 표현하면 박 대통령은 미중 양국으로부터 ‘구애(求愛, love call)’를 동시에 받고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썸을 타는 것이다. 미중이 각각 ‘베팅’과 ‘혈맹’을 언급한 것은 한국에 대한 일종의 외교적  압력이지만 동시에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몸값’이 한층 높아진 것을 방증한다.
  
한국을 차지하려는 미중 양국으로부터 어느 편인가 선택을 강요받기 전에 우리가 미리 움직여야 한다. 그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우리의 이익을 관철하고 설득할 수 있으면 그것이 최선책은 아니라도 차선책은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 국내 지지도의 하락으로 매우 위기다. 그러나 위기가 종종 기회로 다가올 수 있다. 필요하다면 박 대통령은 지구상 양대 강대국인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북핵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또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을 통해 강대국간 ‘세력의 균형자(balancer of power)’ 역할을 할 수도 있다.
 
2년 전 대선 때 표방했던 캐치프레이즈처럼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면 이럴 때 한방을 날려 뭔가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시쳇말로 '양다리 외교'이면 어떤가.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국익을 지키고 실속을 챙기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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