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과 'EPB정신'
최경환과 'EPB정신'
  • 정종석<발행인>
  • 승인 2014.08.02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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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주사위'..관료-학자-언론인-정치인의 '마지막 승부'

 
세월이 참 빠르다.  지금은 세종청사로 모두 이전했지만 20여년 전인 1990년대 언론사 경제부 기자들이 주로 취재하던 곳은 경제부처가 몰려있던 과천 정부청사였다. 이 가운데서도 청사 맨 위쪽(1동)에 자리했던 경제기획원이 기억이 남는다.

그때까지도 해도 부총리가 장관을 겸임하는 기획원은 재무부와 함께 양대 핵심 경제부처였다. 언론사 별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처음 경제부기자로 발령을 받으면 으레 배치되는 곳이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다. 한은에서 기본적인 통화와 금리 등 금융원리를 취재하고 시중은행에서의 돈의 순환원리를 익히고 배운다.
 
경제부기자의 훈련소 격인 한은에서 기본 트레이닝을 마치면 기획원 이나 재무부같은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부처 또는 국세청, 대기업을 담당하는 전경련같은 곳에 출입을 한다. 마치 군대에 가면 논산훈련소를 거쳐 자대 배치를 받아 근무하는 식이다.
 
필자도 현역 기자시절 비슷한 코스를 거쳤다. 한은 출입기자를 마친 다음 상공부(지금의 산업통상자원부)를 거쳐서 기획원 출입기자를 했다. 19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수출 제일주의로 경제정책이 펼쳐지던 시절에는 기획원과 재무부, 상공부는 빅3 경제부처였다.
 
이 세 부처 장관을 모두 역임한 나웅배 전 부총리는 기획원은 ‘오너러블(honorable/명예)’, 재무부는 ‘파워풀(powerful/막강)’, 상공부는 ‘컬러풀(colorful/화려)’하다고 각 부처의 성격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만큼 세 부처가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지면서 오늘날 한국경제를 이끌어온 것이다.
 
필자는 경제기획원 취재시절 최경환 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처음 만났다. 그가 기획원 사무관-서기관(과장) 시절이었다. 그때는 말수도 적고 온화한 얼굴에 가끔 얼굴에 홍조를 띠는 학구적인 관료였다. 당시 기획원은 실력있고 훌륭한 관료들이 많았다. 최부총리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었고, 가끔 출입기자들과 열띤 현안 토론을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최 부총리 취임 후 가장 달라진 정책 기조는 우리가 소득을 늘려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기업에 집중된 그간의 성장 과실을 가계로 흘려보내자는 발상의 전환도 긍정적 반응을 얻고 있다. ‘초이노믹스(최경환+이코노믹스)’, 즉 최 부총리의 경제정책이 큰 방향은 잘 잡았다는게 대체적인 평가다.
 
그의 취임 이후 한국 증시(코스피 지수)는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다. 취임 후 경기 부양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아베노믹스’와 유사한 모습이다. 그래서 ‘초이노믹스’와 ‘아베노믹스’가 곧잘 비교대상이 된다. 이들 정책 간의 공통점은 효과가 있을 때까지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간의 경기부양 공조를 꼽는다.
 
하지만 초이노믹스의 내용을 보면 서로 모순되는 내용들이 있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초이노믹스는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을 대폭 완화한 결과 주택 보유자들은 집을 담보로 맡기고 더 많은 대출금을 빌릴 수 있게 되고, 미주택자들은 집을 사기위해 더 많은 대출을 받을 있게 됐다. 하지만 가계빚이 늘어날 여지를 크게 열어놓았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경기활성화를 위해 집을 살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집값이 오를 테니 빚을 얻어서라도 집을 사라'고 부추겨 거품을 만든 것이 오늘날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금융위기와 경제위기의 본질이 아닌가. 투기적 수요, 즉 부동산 가격 폭등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미분양 주택을 해소하고 경기를 살리는 방안이 중요하다는 것은 복덕방 할아버지도 잘 아는 상식이다.
 
대신 개인소득을 늘리겠다고 하지만 실제 가능성에 대해서는 경제팀도 확실히 자신하지 못한다. 시장을 중시한다는 위스콘신 학파(최 부총리)가 시장원리(인구감소 등에 따른 집값 하락)를 거스르면서 집값을 올리겠다는 것은 난센스라는 지적도 있다.
 
최 부총리는 ‘네개의 얼굴’이 있다. 첫째가 관료, 둘째는 학자, 셋째는 언론인, 넷째는 정치인의 얼굴이다. 지난 70년대 말 행정고시 합격 후 20년 이상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했다. 그리고 공직생활중 미국 위스콘신대 유학생활을 통해 경제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또 언론계(한국경제신문)로 전직해 논설위원과 부국장을 지냈다.이어 정계에 투신해 유권자들에게 표를 호소하며 3선 정치인의 관록을 쌓았다.
 
한마디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그가 이번에 감행한 초이노믹스는 관료와 학자, 언론인,정치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건 일생일대의 ‘승부수’이자 어찌보면 ‘도박’인 셈이다. 성공하면 영웅이 되지만 만약 실패하면 본인 자신은 물론 박근혜 정부까지도 치명타를 입을 수 밖에 없는 엄중한 상황이다.
 
대표적인 초이노믹스인 LTV·DTI 규제완화도 장단점이 엇갈린다. 그가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리 경제가 '앉아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그래서 그가 ‘전격 작전(blitzkrieg)’에 나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집값이 오르면 모두가 빚을 얻어서까지 집을 사려고 해서 집값을 더 밀어 올린다. 반면 집값이 떨어지는 조짐을 보이면 앞다퉈 집을 판다. 현재 문제가 되는 하우스푸어와 렌트푸어를 양산할 수도 있다. 그도 이를 알면서 다만 경기부양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셈이다. ‘갈 길은 바쁜데 해는 저물고(日暮途遠)’ 더 이상 좌고우면을 하다가는 ‘꿩‘도 ’매‘도 모두 놓칠 것이 뻔하다는 것을 감안한 ’필살기(必殺技)‘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 부총리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기대와 우려를 한몸에 받고 있다.  최경환 경제팀은 전임 현오석 부총리 때처럼 시장의 반응이 무기력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가 '실세'이기 떼문이다. 반면 경제부처 장관들에 대한 인사권까지도 손에 쥔 그가 일방통행식 독주를 할 지 모른다는 우려의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새 국세청장을 자신의 출신고교(대구고) 후배를 내정한 것을 비롯해 경제부처의 ‘수퍼갑’인 기재부 출신들로 새 차관급의 절반을 충원했다. 세간에서 이를 알면서도 아직 지켜보는 것은 경제살리기가 워낙 중대한 과제이고, 그러자면 경제팀장인 그가 호흡이 맞는 사람들과 팀웍을 구성하는게 필요하다고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까닭이다.
 
지금 우리 경제는 한국은행 총재와 함께 기재부 장관이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투톱 폴리시(two-top policy)’다. 가계 빚은 많고 소비가 얼어붙은 현 여건에서 금융이 할 수 있는 역할보다 재정이 훨씬 중요하다. 그래서 여느 때보다도 재정의 총괄 집행책임자인 최부총리를 주시하고 있다.
 
한국경제에도 올해 초 발간된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의 ‘21세기 자본론’이 몰고 온 파장이 적지 않다.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 왜 이러한 연구 결과가 전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됐느냐에 있다. 한국도 경제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라는 논쟁이 과거부터 진행돼 왔다. 경제성장이 강조됐던 배경은 성장의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를 통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설을 상당수가 동의했고, 그 결과 성장위주의 정책이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형보다 영·미형에 가까운 사회 시스템을 운영하는 한국은 피케티 교수가 보여준 1970년 이후 영·미형 국가에서 심화되는 소득 양극화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다. 경제성장에 따른 낙수 효과가 현저히 떨어지는 까닭이다.  최부총리는 사회 시스템이 영·미형에 가까운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성장도 중요하지만 아울러 소득 분배와 사회보장제도를 어떻게 구축해 나갈 것인지 적절히 연구를 해야 한다. 현직 정치인인 최 부총리가 누구부다도 잘 알 것이다. 선거 때마다 난무하는 포퓰리즘에 휩쓸릴 경우 항구적인 문제 해결보다 왜곡이 심해질 가능성이 무척 높다.
 
20여년 전 경제기획원에는 위아래를 통들어 박사학위를 가진 관료들이 부처중 제일 많았다, 그래서 기자들이 기획원에는 왜 이렇게 박사들이 많냐고 물으면 관료들은 ‘EPB 학풍(學風)’의 영향이라고 답변을 했다. EPB(Economic Planning Board)는 기획원의 영문 약자다. 재무부가 MOF(Ministry Of Finance)라고 불리면서 오늘날까지 '모피아(재무부+마피아)'라는 말을 낳은 것은 여기서 연유한 것이다.
 
MOF와 달리 EPB에 박사관료가 많았던 진짜 이유는 출입한 지 몇달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됐다. 재무부는 산하 기관이 많고 금융과 세제라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그래서 퇴직 후에도 산하기관이나 금융기관에서 2임,3임...수없이 좋은 자리를 전전하면서 넉넉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반면 예산편성권이 유일한 기획원은 산하기관에서 여생을 보내기에는 좋은 자리가 부족했다. 재무부만큼 금융기관에 직접 영향을 행사하는 부처도 아니었다.
 
EPB에 박사관료들이 많은 것은 “퇴직 후 노후대책(의 일환)”이라는 실토는 어느 저녁자리에서 기획원 관료들의 입에서 나왔다. 퇴직 후 마땅한 일자리가 별로 없으니 박사학위를 담보로 대학강사라도 하기 위한 것이라는 답변이었다. 그 뒤 YS(김영삼 대통령)시절인 1994년 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폐합, 거대한 재정경제원이 됐다. 이후 1997년 말 IMF사태 이후 DJ(김대중 대통령)시절 이래 다시 기획재정부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은 기획원과 재무부 관료들이 서로 섞이고 ‘혼혈’이 되고 말았지만 199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기획원 관료들의 ‘EPB 정신’은 대단했다. 1960~70년대 박정희 경제스쿨에서부터 잔뼈가 굵은 기라성 같은 선배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EPB엔 밤에도 항상 불이 꺼지면 안된다”는 신념과 정신자세는 애국적이고 모범적인 경제관료의 귀감이었다.
 
돌이켜보면 최 부총리도 이른바 ‘노후 대책’으로 기획원 관료 재직중 유학을 해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인 지는 필자는 자세히 모른다. 대신 그는 이제 자신의 노후대책 대신 대한민국 전체 국민들의 삶과 미래의 먹거리 창출 등 항구적인 국가의 ‘노후대책’을 위해서 중차대한 책임을 맡았다.
 
최 부총리에게 운명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그가 앞으로 경제정책을 집행하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숱한 곤경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도 실패도  모두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위기에 ‘구원투수’로 등판시킨 최 부총리가 한국경제를 살릴 수 있을 지, 아닐 지는 이제 전적으로 스스로에게 달렸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경제학자마저도 자국의 경제문제를 쉽사리 해결하지 못한다. 그만큼 경제는 어렵다. 필자는 최 부총리가 앞으로 곤란과 역경을 겪을 때마다 명예로운 ‘EPB 정신’으로 돌아가라고 감히 권하고 싶다. 항상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은 기획원 청사에서 젊음과 청춘을 밝혔듯이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 주어진 권한과 경험, 책임을 바탕으로 사심(私心)없이 혼신의 ‘마지막 승부’를 걸라는 뜻이다.
 
정치권의 사활을 건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궐 선거’도 끝났다. 내후년 4월 총선 때까지 20개월 동안 큰 선거가 없다고 한다. 경제를 살릴 물실호기다. 최 부총리가 선거 때마다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진영 논리에서 한 발짝 물러나 정통 경제처방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관료,학자,언론인,정치인의 여러 길을 걸어온 최경환이 선택할 2014판 ‘나의 길(My Way)’이다. 초이노닉스의 성공을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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