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파티의 흥을 깨라"
이주열 "파티의 흥을 깨라"
  • 정종석<발행인>
  • 승인 2014.08.1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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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성-책임성 갖고 흔들리는 한국 경제 중심 잡아야

 
"중앙은행이 할 일은 파티를 시작할 때 미리 펀치볼을 가져가버리는 일이다"

‘펀치볼(punch bowl)’은 화채그릇이다. 이 그릇을 미리 빼버리면 파티는 김이 새버리고 말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아홉 번 째 의장(중앙은행 총재)으로 1951년부터 1970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재직한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은 중앙은행의 역할을 이렇게 비유했다. 경제가 확장정책이라는 거대한 파티를 시작하려고 할 때 중앙은행이 선제적으로 나서서 ‘파티의 흥’을 깨는 긴축정책을 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기준금리 인하로 중앙은행 독립성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국은행은 이달 기준금리를 종전 연 2.50%에서 0.25%포인트 내렸다. 이로써 기준금리는 2010년 11월 이후 3년10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은은 금리 인하의 배경으로 경제 주체의 심리 위축을 들었다.
 
한은의 금리인하는 주택시장 활성화에는 일단 긍정적 영향을 줄 전망이다. 금리인하로 주택 수요가 부족했던 주택 시장에는 긍정적 효과를 줄 수 있다. 원화 강세로 달러 표시 수입의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 수출 기업의 수익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금리인하는 환율을 상승시켜 수출 기업에 유리한 여건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한은의 금리 인하에 부정적이다. 로이터통신은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의 금리인하 결정을 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주택시장 활성화와 수출 증대에는 효과가 있겠지만 시기 상조라는 지적이다. 싱가포르 OCBC의 이코노미스트인 윌리언 워런토는 이 통신에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는 특히 한국의 경우 오래된 이슈였다”며 한은의 독립성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주열 총재는 지난 4월 취임하면서 한국은행이 금리 설정을 독립적인 위치에서 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5월 금리를 동결한 직후 ‘현재 금리가 경기회복을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이고 향후에는 금리인상 쪽으로 방향을 잡겠다’는 발언을 했었다. 그런데 별다른 경기변동이 없는 데도 3개월 만에 입장을 뒤집었다. 중앙은행 총재로서의 발언과 자질마저 의심된다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필자도 과거 현역 시절 한국은행을 출입하며 금융정책을 취재한 적이 있다. 이번 이주열 한은 총재의 금리인하 결정과정을 들여다 보면 한은이 다시 ‘재무부 남대문출장소’가 돼 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총재가 외견상 정부와 여당이 한 목소리로 내세웠던 경기부양론에 자율을 강조하면서 화답하는 모양새를 갖춘 것 같다.그러나 내실은 박근혜 정부의 2기 경제팀장인 최경환 부총리의 거센 압박에 ‘백기’를 든 모양새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한때 한은을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라고 부른 적이 있다. 금리를 비롯한 주요 통화정책을 형식상으로는 한은과 금융통화운영위원회가 결정하지만 실제로는 재무부의 지시와 명령에 의해 결정됐기 때문이다.
 
한은이 한동안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해 투쟁을 벌여온 것도 이런 예속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재무부장관이 의장이던 금통위 의장을 한은총재가 가져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제는 한은이 명실 공히 통화정책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주체가 되는 새 세상이 온 줄 알았다.
 
우선 한은의 금리인하 배경설명에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은은 그동안 금리를 내릴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은이 경제심리를 보는 눈이 두 달 만에 급변했다. 경제심리 악화를 금리인하의 주요 배경으로 들었다. 그동안 알 듯 모를 듯한 발언을 했을 때 이 총재는 이미 정부 여당의 압박에 굴복해 금리인하를 결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은의 배경 설명이 정부논리와 그대로 일치하는 탓이다.
 
한은이 또 소비심리를 들고 나온 것은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타율에 의한 금리인하 결정이라는 의심을 부른다. 소비 내구재 판매 등 일부 내수소비 관련 지표가 개선된 상황에서 한은이 소비심리를 금리인하 배경으로 든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금리인하로 인한 가계부채 증가 우려에 대해서도 종래와는 사뭇 다르다. 금리인하에 따른 가계부채 증가를 경계해야 한다는 종래의 태도와는 달리 현 상황에서 금리를 내려도 금융안정 측면에서 크게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정부·여당의 ‘힘의 논리’에 밀려 금리인하의 결단을 내리고 만 느낌이다.
 
그렇다면 경제가 확장이라는 거대한 파티를 시작하려고 할 때 선제적으로 나서서 ‘파티의 흥’을 깨는 중앙은행 고유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는다. 마치 ‘재무부 남대문출장소’ 위상과 역할에 그쳤던 옛 한은을 연상하듯이 말이다.
 
지금 국내경기가 좋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잘 안다. 정치권이 세월호 사태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토라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는 무슨 굿이든 해야 할 판이다. 따라서 자신의 임기 안에 성과를 나타내고자 하는 정부나 정치인들은 파티가 깨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오히려 흥이 깨질 때마다 금리인하와 경기부양을 통해 파티를 이어가려고 한다.
 
이러한 때에 중앙은행이 독립적이지 못하면 향후 경제 전체를 어려움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경고를 유념해야 한다. 내로라 하는 세계의 경제전문가들이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요구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금리정책 실기가 경제전체의 위기를 불러온 대표적인 사례는 1980년후반부터 시작된 일본의 장기불황과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다. 일본에서는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은행이 엔고에 따른 불황을 저지하기 위해 장기간 저금리 정책을 지속했다. 이는 자산버블 및 붕괴를 이끄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당시 일본은행은 과도한 완화정책이 경제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금리인상 필요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정부에 의해 번번이 묵살됐다. 결국 빚이 늘어났다. 일본은행은 뒤늦게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는 버블붕괴와 장기불황을 초래했다.
 
미국에서는 2000년 5월부터 12차례에 걸쳐 금리를 1%까지 내려 과잉 유동성을 불러왔다. 이것이 주택시장으로 흘러들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주택시장의 붐이 침체된 미국의 경기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란 낙관적 경제인식이 형성됐다. 미국 FRB는 시장과 정부의 이러한 기대를 미리 차단하지 못했다.
 
결국 시장의 지나친 기대감은 도덕적 해이를 불러왔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저신용자에게까지 대출을 허용하는 도덕적 해이를 초래했다. 결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 위기에 대해 미국 FRB는 별다른 대응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큰 위기를 가져왔다.
 
한은 금통위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많은 것은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금리정책 결정의 실기가 지속될 경우 미국과 일본의 위기가 우리나라에서도 재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은 금통위는 독립적 금리결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최대 적(敵)'으로 불리는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을 예방·관리하고 국내 금융시장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국가 기구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물가가 치솟고 금융불안이 높아지면서 한은의 독립적 역할 수행이 사실상 실패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다.
 
현재 당면한 최대 현안은 금리 인하가 실제로 효과를 발휘할 것인가이다. 금리 인하의 기본적인 목적은 더 많은 자금(유동성)을 공급해 소비와 투자를 증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경제의 문제는 사실은 유동성 부족에 있지 않다. 실제 현재 금리가 높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물론 대출 금리는 이보다 높지만 금리가 조금 더 낮아진다고 해서 더 많은 대출을 받으려는 기업이나 가계는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오히려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있다는 진단이다. 유동성 함정은 금리를 인하하거나 재정지출을 확대하여 유동성을 공급하는 정책을 취해도 경기가 부양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1930년대의 대공황 때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은 것을 두고 통화정책이 함정에 빠진 것과 같다는 의미로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Keynes)가 처음 사용했다.
 
경기부양책을 취하는 정부는 금리를 일정 수준 이하로 내리고 시중에 돈을 많이 풀어 유동성을 공급함으로써 사람들이 소비를 늘리고, 기업은 낮은 금리로 자금을 차입하여 투자를 늘릴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이자율이 매우 낮으면 사람들은 가까운 장래에 이자율이 다시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하며 현금으로 보유하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기업은 경기가 나빠질 것을 우려하여 생산을 줄이고 투자를 미루게 된다. 그 결과 중앙은행이 경기부양을 위하여 유동성을 공급해도 화폐가 순환하지 않고, 개인이나 기업의 수중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 실물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학설이다.
 
유동성 함정의 사례로는 19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이 언급된다. 당시 일본은 오랫동안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유지하는 저금리정책을 폈으나 소비 진작이나 기업의 투자로 연결되지 않고, 통화량 증가분은 금융권 안에서만 맴도는 상태가 지속돼 장기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금리인하 카드는 소문에 비해 실물경제에는 효과가 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사상 최대 규모인 1000조원이 넘는 가계대출 규모, 500조원을 넘나드는 10대 기업의 사내 유보 등을 고려할 때 금리 인하를 통해 추가로 공급할 수 있는 시장의 유동성은 부동산 투기에 소요되는 일부 자금에 국한될 수도 있다.
 
금리 인하로 인해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가계 부문이다. 이르면 내년 중반, 아무리 늦어도 내후년 초반이면 미국 FRB가 금리를 인상할 전망이 우세하다. 여기에 뒤이어 한은이 금리를 인상한다고 하더라도 그 때까지 남은 기간은 1년 내지 2년 밖에 안된다. 금리인하 카드가 효과를 발휘하기에는 길지 않은 시간이다.
 
또 다른 측면은 가계부채 문제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나 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는 실패할 경우 가계대출 문제를 촉발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정책이 성공해 거래가 활성화해도 그동안 잠재돼 있던 투기심리에 불을 붙이면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킬 우려가 있다.
 
경제 활성화를 기치로 내건 최경환 경제팀의 바쁜 마음은 이해되지만 갈 길이 멀다. 경제는 서두른다고, 또 의지만 있다고 살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중앙은행 총재의 '이유있는 제동'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금통위는 국내 통화신용정책을 수립·심의·의결하고 국내 거시경제의 흐름을 조절하는 막중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주열 총재는 금통위의 당연직 의장이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업무수행이 정치적 이유로 좌우돼서는 안된다. 경기가 나쁜데 좋다고 하거나 또는 중앙은행 총재가 자리에 연연해 정책결정을 해서는 곤란하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결정이 독립성과 책임성을 포기하고 새 경제팀의 경기부양 정책에 투항한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 이주열 총재는 가슴이 매우 아플 것이다. 영광스러운 한은 총재 자리가 소신과 결단을 통해서만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최경환 경제팀의 경기부양책이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채 단기적인 경기부양을 위해 양적 완화에만 매달리는 대증 요법이라는 비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독립성과 책임성을 갖고 흔들리는 한국 경제의 중심을 잡아야 할 책무는 이제 한은과 이 총재의 몫이다. 한은 총재는 영광스럽지만 고독한 자리다. 40년 가까이 한은에서 청춘과 인생을 바친 이 총재는 이제 거대한 파티를 시작하려는 최 부총리에 맞서 한번 씩 ‘파티의 흥’을 깨는 소신과 결단을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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