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원님재판'
현대판 '원님재판'
  • 정종석<발행인>
  • 승인 2014.08.2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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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 '멋대로' 밀실 심의 이어지면 국민들이 불행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춘향전에서 변사또는 춘향이가 수청을 들지 않는다고 형틀에 묶어놓고 이렇게 다그친다. 권선징악 스토리로 만들다 보니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겠지만 지방 고을에서 원님은 행정과 사법을 총괄하는 절대 권력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원님재판’이란 말이 나왔다.
 
조선시대에는 지방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도 사법과 행정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국왕이 수사의 최고 책임자인 동시에 재판의 최고 책임자였다. 죄인을 다스리는 형조는 오늘의 검찰과 법원을 겸한 기관이었다. 중대 범죄를 다루는 의금부 또한 수사와 판결을 같이 했다.
 
원님재판은 결국 ‘원님이 수사하고 원님이 재판한다’는 뜻이다. 수사와 재판이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경우를 비꼬는 의미다. 불고불리(不告不理)의 원칙, 즉 검사가 기소하지 않은 혐의자나 혐의 내용을 법원이 심판하지 못하는 게 근대 사법체계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규문주의(糾問主義)처럼 소추 기관의 소추 없이 법원이 직권으로 심리하는 것이다.
 
최근 육군 28사단 윤모 일병의 폭행 사망 사건을 계기로 군 사법체계 개혁 논의가 다시 일었다. 우리나라는 부대 지휘관이 군 검찰과 군 판사 인사권을 쥐는 등 이른바 ‘원님재판’이 군에서 이뤄진다. 군내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수사도 스스로 하고, 재판도 스스로 하는 구조이다. 그래서 군사 재판의 독립성 부재와 폐쇄성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군 사법 개혁은 참여정부 당시 사법개혁 과제에 포함돼 지난 17대 국회에서 개혁 법안들이 제출됐지만, 군 수뇌부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입법이 무산됐다. 핵심 쟁점은 무엇보다 사단급 이상 부대 지휘관에게 군 검찰과 군 판사의 인사권을 부여하는 군사법원법을 고쳐 이른바 '원님 재판'을 방지하는 것이다.
 
부대 지휘관이 인사권을 쥐는 바람에 독립적인 수사와 재판이 이뤄지지 않고, 지휘관의 책임도 묻기 어려웠던 탓이다. 특히 군 검찰에 대한 지휘 및 감독 권한도 각급 부대 지휘관에 주어져 있다. 지휘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병영 내 사건을 축소하거나 은폐할 가능성이 높은 구조다.
 
이번에 논란이 된 윤 일병 가해자들의 재판만 봐도, 사고 책임선상에 있는 28사단 부사단장(대령)이 심판관을 맡아 재판을 진행해 왔다. 가해자들에게 살인이 아닌 상해 치사 혐의를 적용해 '솜방망이' 기소한 것도 다름 아닌 해당 사단 소속 군 검찰이다. 법조인이 아닌 일반 군인이 재판장 역할을 하는 '심판관 제도'와 각급 부대 지휘관이 선고된 형량을 깎아줄 수 있는 '확인조치권(감경권)'을 개선해 이른바 '원님 재판'을 막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쉽게 얘기하면 ‘내가 지은 죄를 내가 수사를 해서, 나를 기소를 한다. 그리고 그 죄를 내가 재판을 해서 판결을 내리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형량 감경권을 동원해서 판결에 의해서 나온 그 형량을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할 수가 있는 것’이 현대 우리나라 군대의 재판인 셈이다. 이러니 가히 놀랍지 않은가.
 
여기까지는 아득한 과거 또는 군대라는 특수조직의 문제다. 일반인들이 일상 생활에서 직접 겪는 일들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금융계에서 '원님재판'이 일어나고 있다면 국민들이 과연 믿을까.
 
금융감독 당국의 금융사 및 임직원에 대한 현행 제재 방식은 마치 '원님 재판'처럼 허술하다. 이에 따라 현행 제재심의위원회를 폐지하고 금융감독 당국에서 독립된 별도의 제재기구를 신설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나왔다.
 
지난 6월부터 시작돼 2개월 동안 진행된 KB금융에 대한 징계 수위는 예상과 달랐다. 당초 금융감독원은 임영록 KB금융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에게 중징계인 '문책경고'를 통보했지만 정작 금융감독원장의 자문기구인 제재심의위원회는 '중징계'는 무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임 회장과 이 행장에게 모두 경징계인 '주의적 경고'를 내렸다. 두 사람 만이 아니라 중징계를 통보받은 KB금융 임직원 중 상당수의 제재 수위가 한 단계씩 낮춰진 것이다.
 
현행 제재 방식의 문제점은 금융감독원 부원장이 제재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는 점이다. 사법부로 치면 검사와 판사의 역할을 금감원이 겸임하는 것이다. 또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의 제재 권한 구분도 자의적이다. 제재심의위원회 자체도 금감원장의 자문기구 일종으로 근거 법률 등 법적 지위가 모호하다. 제재 사유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는 등 제재 기준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 제재 대상자의 항변권도 제약을 받고 있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마치 옛날의 ‘원님 재판" 식 그대로다.
 
금융감독 당국의 제재를 둘러싸고는 종종 무리한 제재라는 불만이 금융권에서 제기됐다. 이것이 금융위와 금감원 간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임 회장 징계를 앞두고 감사원이 금융감독 당국과 상충되는 유권해석을 내놔 논란을 빚기까지 했다.
 
금융당국이 중징계를 호언장담했던 임 회장과 이 행장에게 경징계로 수위를 낮춰주면서 금융당국의 제재권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입맛에 따라 징계 대상이 정해지고, 외부 압력에 제재 수위가 흔들리고, 그러다 보니 해당 금융사는 대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징계 수위가 뒤집힌 것이 이번 만이 아니다. 금감원은 지난해 어윤대 전 KB금융지주 회장에게 ING생명 인수협상에서 미공개 정보가 유출된 데 대한 감독 책임을 물어 중징계를 사전 통보했지만 역시 제재심에서 경징계로 결과가 바뀌었다. 올 4월에도 하나캐피탈 불법대출 사고와 관련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의 퇴직금부터 미술품 거래내역까지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결국 김종준 하나은행장만 중징계를 받고 김 전 회장은 경징계에 그쳤다.이른바  '표적 조사'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셈이다.
 
또 다른 문제는 금감원 제재심이 각종 로비 등 외부압력에 취약해 제대로 기능을 못한다는 것이다. 이번 KB금융 관련 제재심도 두 달 넘게 제재가 지연되면서 감사원에서 유권해석 문제를, 금융위원회에서 정보이관 당시 사업계획서 미이행 논란 문제를 중간에 제기하면서 제재결과가 오락가락했다.  결국 정보이관 문제는 아직 매듭도 짓지 못한 채 분리 조치해 다음달 다시 제재심에서 다룰 예정이다. 이번 제재는 중징계를 외쳐온 금감원이 독립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경징계라는 하나 마나 한 '새벽 쇼'를 펼친 셈이 돼 버렸다.
 
정치권력에 따라 금융시스템이 움직인다면 이야말로 국가경제를 위해서도  큰 문제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제재 심의 절차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위반행위에 대한 제재를 추진하는 검사의 역할과 제재 판단을 내리는 판사의 역할을 같은 곳에서 겸임하는 것부터 고쳐야 한다. 지탄을 받는  군사재판이나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후진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정치적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제재가 이뤄져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제재의 대원칙이다. 그런데 금감원이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객관성과 공정성을 기초로 해 징계수위를 결정한 것이 아니고 '봐주기'에 의한 경징계를 미리 결정해 놓고 배경설명을 했다는 주장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당초 중징계를 하겠다는 방침은 어디가고 뒤늦게 다른 논리로 근거를 찾다보니 금감원이 결국 무리수를 두고 만 꼴이다.  
 
조선 초 위정자들은 고려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분쟁과 소송의 폭주를 지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그만큼 역사상 소송이 많았다는 증좌다. 조선 위정자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라서 '송사 없는(無訟) 사회'를 이상향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소송을 줄이는 ‘단송(斷訟) 정책'을 폈으나 조선 시대 내내 소송은 계속 늘어났다. 결국 후기 들어 소송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선회, 자연스레 소송법이 발달했다고 한다.
 
백성이 수령·관아에 재판을 요청하는 문서를 ‘소지(所志) ’라 했다. 신분별 각종 소지 양식을 수록한 책 '유서필지'는 조선의 스테디셀러였다. 백성은 수령(원님)의 재판에 승복하지 못하면 상소할 수 있었다.  관찰사, 형조를 거쳐 마지막으로 왕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원님재판은 지금과 달리 행정권과 사법권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지 않은 조선에서 각 고을의 소송 처리는 지방관인 수령이 담당한 데서 온 '부(否)의 유산'이다. 소송 처리의 일차적인 책임을 맡은 고을 수령의 역할이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일정한 절차나 원칙도 없이 수령이 제멋대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여지가 컸다.
 
물론 조선시대 역시 고을 원님인 수령의 판결에 불복할 경우 상급기관에 제소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즉, 재판 결과가 억울하다고 생각할 경우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해결이 안 되면 다시 중앙기관인 사헌부에 항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문고(申聞鼓)를 치거나, 조선 후기처럼 상언(上言)․격쟁(擊錚)의 방식으로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길도 있었다.
 
소설 춘향전에서 춘향이가 서울로 떠나는 이몽룡에게 울고불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 조선의 재판 절차가 잘 드러난다. 춘향은 이몽룡이 나중에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소지를 지어 남원 원님, 전라 감사, 형조와 사헌부, 사간원, 비변사에까지 소를 올릴 것이고 “(왕이) 능행거둥하실 때에 … 왈칵 뛰어 내달아서 바리뚜껑 손에 들고 땡땡하고 세 번만 쳐서 격쟁까지 하오리다”라고 다짐한다.
 
이번 금융권 징계가 몇달 째 늦어지는 바람에 KB금융지주는 물론 국민은행 등 KB계열사들은 업무가 사실상 공백상태였다. 그동안 후속인사도 미루고 여름휴가도 즐기지 못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금융사의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제재를 놓고 불과 몇 명이 밀실에 모여 '원님 재판' 식으로 제재를 진행한다는 사실은 현대사회에서 매우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재심을 없애고 외압에서 자유롭고 감독권과 제재권을 분리한 독립 제재기구(가칭 금융제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금융기관의 비리나 잘못한 행위를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 다만 가장 좋은 판결은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들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상식과 합리적인 재판과정에 기초해야 한다. 금융당국이 금융계 종사자들을 '원님재판' 대상으로 보고, 그들을 원성을 토하는 '현대판 춘향이'로 몰아서는 안된다.  또  신뢰를 먹고사는 금융권의 사기를 꺾어서도 곤란하다 . 금융권의 후진적인 '원님재판'은 이제 개선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는 금융인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주체인 우리나라 금융소비자들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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