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법흥 김씨(法興金氏)-199,544명
(41)법흥 김씨(法興金氏)-199,544명
  • 정복규
  • 승인 2014.09.11 14:50
  • 댓글 0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법흥김씨(法興金氏)의 시조 김 춘(金春)의 선대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후손인 김렴이다. 그가 고려 때 김해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김해를 본관으로 삼았다. 경순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경주김씨와 한 뿌리다.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와는 뿌리가 다르다. 임진왜란 때 왜군으로 참전했다가 우리나라에 귀화, 김씨로 사성(賜姓)된 김충선계의 김해김씨(우록김씨)와도 전혀 다른 성씨다.

따라서 김해김씨 3개 성은 각각 다른 성씨다. 구분하기 쉽게 김수로왕계의 김해김씨를 선김(先金)이라 한다. 그리고 김렴계 김해김씨와 사성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 우록김씨)를 합쳐서 후김(後金)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김렴계는 자손들이 번창함에 따라 고려 인종 때 김녕군에 봉해진 김시흥을 중조(中祖)로 삼아 본관을 김해에서 김녕(金寧)으로 바꾸었다. 그 때 본관을 바꾸지 않고 원래 후김 김해김씨로 남은 파가 바로 김춘을 시조로 하는 법흥파다. 법흥파는 바로 후김 김해김씨 김렴계의 원류(源流) 본파(本派)인 셈이다. 그래서 법흥파로 일관되게 이어져 내려온 법흥김씨(法興金氏)와 중간에 본관을 김해에서 김녕으로 바꾼 김녕김씨(金寧金氏)는 그 뿌리가 같다.

김 춘은 김해군(金海君) 김 렴의 14세손이다. 김 춘이 김해군수로 있을 때 그의 8촌 형 김문기가 사육신과 함께 화를 입으면서 삼족을 멸하는 위난이 닥쳤다. 김 춘은 멀리 황해도 풍천으로 피신했다가 성종 2년에 다시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동하면(東下面) 법흥동(法興洞)에 옮겨 터를 잡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법흥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문중에서는 법흥파를 법흥김씨(法興金氏)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흥파는 오늘날에도 평안북도 용천(龍川)을 중심으로 주로 평안도 일대에 살고 있다. 김 춘의 묘소는 실전되고 평북 용천군(龍川郡) 동상면(東上面) 덕향산(德香山)에 제향하였으나, 남북이 분단되어 근황은 알 수 없다.

법흥김씨(法興金氏)는 조선조에 와서 여러 후손들이 벼슬길에 올랐다. 당상관으로는 판서 이하의 문관 43명, 무관 27명이 있다. 당하관으로는 문관 39명, 진사 9명, 무관 20명에 이르렀으며 항일투사도 많이 있다. 특히 임진왜란, 정묘호란 등 나라가 어려울 때 무관으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 많다.

역대 주요 인물을 보면 김덕순(金德純)은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충무위부장군이 되었고, 정묘호란 때도 의병장으로 용골산성에서 전공을 세웠다. 김종민(金宗敏)도 무과에 급제,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용골산성을 지키고 공을 세워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김종민은 숙종 33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 등을 증직하였고 정려를 세웠으며 충열사에 제향되었다. 이밖에 정묘호란 때 용골산성에서 전공을 세워 관직에 올랐거나 증직을 받은 사람들로는 훈련첨정 김예원(金禮源), 병절교위 김여성(金汝聖), 군자감주부 김여례(金汝禮), 훈련원정 김여의(金汝義) 등이 있다.

또 일제 아래에서 독립을 위해 애쓴 이들도 있다. 김진태는 101세(稅) 사건으로 중국에 망명, 국내외 민족 교육에 공헌했다. 김봉문은‘105인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김창건은 6년형을 받았다. 김태주는 독립단을 위하여 군자금을 백범에게 전달했다. 김태주는 3·1운동 투옥을 비롯 일생동안 27번이나 투옥되었다.

김태원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서 활동 중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김봉재는 대한청년단 선천지부장으로 항일운동을 하다 1년6개월 복역 후 옥림학원을 세웠다. 김영재는 김구와 김홍일의 연락 책임자였고 광복 후 제1비행단장이 되었다. 김병원은 중국군 정규장교와 광복군 구대장으로 항일운동을 했으며 6·25 때 전사했다.

중국 대륙에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김홍일(金弘壹) 장군은 김해김씨 법흥파가 낳은 인물이다. 그는 한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국난 극복,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조국의 발전을 위해 보냈다. 1898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김홍일 장군은 일제시대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군 장교로 임관,19사단장과 19집단군 참모처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또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의거에 사용할 폭탄을 제조해 지원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 참모장으로 항일 독립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시흥지구 전투사령관,1군단장, 육군종합학교 총장을 지냈다. 예편 후에도 자유중국 대사와 외무부장관, 7·8대 국회의원 및 신민당 총재, 재향군인회 회장,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법흥김씨는 지난 1989년 8월 현재 종친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참고로 당시 종친회의 임원을 보면 회장 김효승, 부회장 김복기·김재학, 총무 김기보, 부총무 김정순, 간사 김득윤, 감사 김제항·김기덕, 고문 김여영·김하진·김병규·김형철씨 등이다. 주요파는 법흥파(원류본파), 동문파, 산후파, 주의파, 고강파, 당산파, 만다지도파, 만진리파, 남시파, 선천사토파, 사동파 외 33파가 있다.

본관 법흥은 평안북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의 지명이다. 그러나 동하면과 법흥동은 오늘날 행정구역이 어떻게 변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용천은 원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한사군(漢四郡) 때 낙랑군에 속하였다. 그 뒤 발해의 서경(西京)에 속하였고 고려조에는 안흥군(安興郡)이라 불렸다. 조선조 태종 4년에 의주(義州), 이언방(伊彦坊)을 군(郡)에 소속시켰으며 13년에는 용천부(龍川府)로 바꿨다. 이후 변천하다가 1895년 용천군(龍川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날 용천군의 동쪽은 피현군, 서쪽은 압록강과 신도군에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염주군, 북쪽은 신의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용천읍, 북중·진흥·용암포 노동자구, 산두리·서북리·동신리·신암리·용송리·양서리·견일리·용연리·덕흥리·쌍룡리·수성리·쌍학리·동하리·오흥리·서석리·덕승리·장산리·인흥리·학흥리·황금평리 등 1개 읍 3개 노동자구 20개 리가 있다. 군 소재지는 용천읍이며 인구는 1991년 현재 130,535명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김극검(金克儉) : 문과(文科) 세조12년(1466) 중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김기손(金驥孫) : 문과(文科) 성종13년(1482) 친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유신(金庾信) : 문과(文科) 중종11년(151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명악(金命岳,1821 辛巳生) : 문과(文科) 철종5년(1854)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등 모두 1289명이 있다. 문과 128명, 무과 536명, 사마시 471명, 역과 59명, 의과 39명, 음양과 15명, 율과 33명, 주학 8명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법흥김씨는 1985년에는 총 26,902가구 125,277명, 2000년에는 총 59,880가구 199,54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무려 3만3천여 가구,7만4천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5,860명, 부산 24,039명, 대구 1,667명, 인천 584명, 경기 20,225명, 강원 4,747명, 충북 8,060명, 충남 15,050명, 전북 2,742명, 전남 21,171명, 경북 2,017명, 경남 5,054명, 제주 4,061명이다. 부산, 전남, 경기 지역에 많이 살고 있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48,383명, 부산 18,473명, 대구 10,291명, 인천 11,066명, 광주 6,105명, 대전 5,226명, 울산 3,621명, 경기 38,557명, 강원 4,577명, 충북 4,342명, 충남 6,601명, 전북 7,301명, 전남 11,274명, 경북 8,576명, 경남 13,061명, 제주 2,090명이다. 1985년과는 달리 전국에 고루 번져 있다. 특히 서울 지역에는 약 3배가량 인구가 늘어난 점이 눈에 띈다.

한편 법흥김씨의 인구와 과거 급제자 수는 같은 김해김씨 후김으로 분류되는 우록김씨(사성 김해김씨)와 합쳐진 숫자이다. 통계청 조사 때 두 성씨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묶어 발표했기 때문이다. 한편 현재 국내에는 별도로 우록을 본관으로 한 우록김씨가 2000년 현재 총 143가구 468명에 이른다. 따라서 김해김씨 후김 인구는 법흥김씨가 대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추정된다.

------------------------------------------------------------------------

 필자 정복규 프로필

● 전북매일 편집국장, 논설위원

● 익산신문 사장

● 현재 새전북신문 수석 논설위원

● 현재 성씨 전문강사(한국의 성씨를 통한 역사탐구)

 ( 저 서 )

• 한국의 성씨: 성씨를 찾아서

• 한국의 성씨: 1,2권

• 칼럼집: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핸드폰이 세상을 지배한다/ 개성있는 인재를 키워라

• 유머집: 각하 코드를 맞추세요

● 핸드폰: 010- 5162- 8632

● 이메일: jungbokyu@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서울이코미디어
  • 등록번호 : 서울 아 03055
  • 등록일자 : 2014-03-21
  • 제호 : 서울이코노미뉴스
  • 부회장 : 김명서
  • 대표·편집국장 : 박선화
  • 발행인·편집인 : 박미연
  •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58, 1107호(여의도동, 삼도빌딩)
  • 발행일자 : 2014-04-16
  • 대표전화 : 02-3775-4176
  • 팩스 : 02-3775-41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미연
  • 서울이코노미뉴스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서울이코노미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eouleconews@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