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過猶不及)’이 확산시킨 ‘역사 논쟁’
‘과유불급(過猶不及)’이 확산시킨 ‘역사 논쟁’
  • 김명서
  • 승인 2023.09.2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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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기념관엔 홍범도‧정율성 없어…“논란‧시빗거리 원천봉쇄 의도?”

[김명서 칼럼] 며칠 전 서대문독립공원 옆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기념일인 2020년 4월11일 착공해, 2년 만인 작년 3월1일에 개관한 4층 건물이다. 주말이면 즐겨 찾는 안산자락길 초입에 자리 잡고 있어 진즉에 가볼 만도 했지만, 무심코 지나치기만 하다가 문을 연지 1년 반이 지나 처음으로 찾아간 것이다. 

방문의 이유는 ‘역사 논쟁’으로까지 비화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들의 행적이 어떻게 평가되고 기록됐는지가 궁금해서였다. 논란은 중국‧북한 군가 작곡가인 정율성으로 시작해 홍범도의 소련공산당 전력 시비로 가열됐고, 기념관 건립이 대대적으로 추진 중인 이승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념관에서는 홍범도와 정율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율성이야 일반 대중에게 생소한 인물이기에 그렇다손 치더라도 홍범도는 그 유명한 봉도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아닌가. 그런데도 사진 등 관련 자료는 물론 ‘홍범도’라는 이름 석 자조차 안보였다. 

1920년 6월과 10월의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는 위치가 어딘지를 알려주는 지도와 함께 ‘봉오동, 청산리 대첩에서 대승’이라는 소개 문구가 전부였다. 대첩의 주역이 누구였고, 경위와 전과는 어떠했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었다. 홍범도의 직접 개입 여부를 두고 논란이 뜨거운 1921년 ‘자유시 참변’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홍범도가 이 정도이니 정율성의 흔적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싶었다.  정율성은 19살에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했고 26세 때인 193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의열단 관련 기록도 찾아보았지만 ‘의열투쟁’이라는 간단한 설명으로 뭉뚱그려졌을 뿐 ‘의열단’에 대한 별도 소개는 없었다.

홍범도나 정율성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압축’과 ‘생략’이 다반사였다. 주관적 판단과 평가는 억제한 채 객관적 사실 나열에 치중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임시정부 설립과정 등 상세히 소개해야 할 법한 주요 사안들로 몇 줄 설명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논란 또는 시비의 소지를 아예 원천봉쇄하려 한 것 아니냐는 느낌마저 들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 망명 중인 이승만이 어떤 과정을 거쳐 대통령이 됐고, 무슨 이유로 물러났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었다. 이 역시 이승만의 공과에 대한 논란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정부…항일투쟁 당시 공산당 전력 정부 서훈에 문제 안 돼

하지만 논란으로 친다면야 임시정부 수립 단계부터 문제가 컸다. 이념적 성향과 배경이 다른 세력들이 참여하다 보니 독립운동 방식 등을 놓고 심각한 대립과 반목이 이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세력은 크게 세부류였다. 이승만 등은 무장투쟁보다는 외교적 활동으로 독립기반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주의자인 안창호 등은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키우자는 ‘실력양성론’을 내세웠다. 반면 공산주의 계열의 이동휘 등은 즉각적인 ‘무장투쟁론’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동휘 등은 1919년 11월 통합임시정부의 대통령 바로 아래 직위인 국무총리를 맡았었다. 

한마디로 임시정부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손잡은 좌우합작 정부였다. 그런데도 ‘자주독립’의 기치 아래 하나로 모이다보니 이념적 성향은 큰 걸림돌이 안 되었다고 한다. 공산주의는 3·1운동을 전후해 새로운 사조로 유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다 연해주 등 러시아 땅에서 항일투쟁을 하려면 공산주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평가다. 

이러한 이유로 6.25 이후에도 독립운동가들의 일제 당시 공산당 가입 전력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홍범도는 박정희 정부 때인 1962년 건국훈장을 받았다. 고려공산당을 창당하는 등 전형적인 공산주의자인 이동휘는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됐고, 1995년에 건국훈장이 수여됐다. 

“홍범도 ‘항일 아이콘’ 소환은 항일투쟁을 국군 뿌리로 삼으려는 목적” 

이런 맥락에서 홍범도의 공산당 전력 등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과유불급(過猶不及)’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도가 지나치다 보니 '역풍'을 맞은 것이다. 

홍범도의 사례를 보자. 문재인 정부가 2021년 유해를 봉환한 것은 합당한 수순이었다. 봉환은 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도 줄곧 시도했던 사업이었다. 하지만 육사에 홍범도 흉상을 설치한 이유는 뚜렷치 않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2018년 3월 육사 졸업식에 맞춰 그 두 달 전부터 졸속으로 설치됐다는 게 최근에 나온 몇몇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김원봉이 이끈 항일운동을 국군의 뿌리로 만들기 위해 서훈을 시도하다가 반대 여론에 밀리자 홍범도로 대체한 것”이라고 지적도 제기된 상태다. 홍범도를 ‘항일의 아이콘’으로 내세우려고 의도적으로 소환했다는 것이다. 2021년 8월 홍범도에게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한다. 1962년에 이어 또다시 최고등급 훈장을 이중으로 수여한 것이다. 

반면 이승만은 임시정부기념관 건립 과정에서도 외면당했다. 당시 정부 ‘추진위원회’가 거리에 내건 홍보플래카드에는 김구 윤봉길 등 주요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나열됐지만 이승만은 없었다. “한국 사회 모든 악의 근원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것”이라는 ‘운동권’ 논리에서 비롯된 ‘이승만 깎아내리기’가 정권 차원에서 은연 중 계속됐던 것이다. 

그랬던 이승만이 얼마 전부터 기념관 건립이 본격 추진되면서 다시 부상하고 있다. 대국민 모금운동의 성과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더라도 이종찬 광복회장 등이 지적한 것처럼 ‘이승만 신격화’는 경계해야 한다. 장기집권 시도와 그에 따른 4.19 유혈 사태는 씻을 수 없는 과오다. 정치적 의도까지 개입해 행적과 업적을 의도적으로 첨삭하거나 부풀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역사는 하나의 흐름이라고 한다.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사를 단칼에 재단하려다가는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긍정과 부정의 측면을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특히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그렇다.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동일하고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홍범도와 정율성이 없는 임시정부기념관은 분명 부실했다. 엉성했고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도 ‘과유불급’에 따른 볼썽사나운 ‘과대포장’보다는 훨씬 낫다. 부실은 적절하게 바로 잡고, 부족함은 내실 있게 채우면 되기 때문이다. 

<필자 소개>

김명서(clickmouth@hanmail.net)

-서울이코노미뉴스 부회장

-전 서울이코노미뉴스 대표, 주필

-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

-전 서울신문 편집담당 상무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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