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高卒) 성공시대'
'고졸(高卒) 성공시대'
  • 정종석 발행인
  • 승인 2014.11.23 00:50
  • 댓글 0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벌사회’ 벽 깨고, 능력중심 사회 만들어야

 
우리나라는 대기업 천국이다. 청년실업 대란이 벌어진 지금 젊은이들은 웬만한 중견-중소기업에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오로지 대기업에 들어가야만 주위에서 인정을 받고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 출신에 온갖 스펙을 갖춘 인재가 모인 대기업에서 ‘별’을 달기 위해선 남보다 배로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정을 받고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고졸이면서 오로지 능력과 성과 만으로 대기업 사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 있다.

 ‘세탁기 장인’으로 유면한 LG전자 HA(홈어플라이언스) 사업본부 조성진 사장은 1978년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에 고졸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조 사장은 세탁기에 대한 열정 하나로 일본 기술을 넘고 마침내 세계가 인정한 ‘통돌이 세탁기’를 만들어 낸 주인공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주요 부품을 수입해 조립하는 방식으로 세탁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조 사장이 처음 배치된 세탁기 부서는 소위 잘나가는 부서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국산 기술의 불모지이던 세탁기 시장에서 치열한 연구를 거듭하며 세탁기 설계 및 개발과 제품 테스트를 진행, 일본은 물론 세계에도 없는 세탁기를 연달아 선보였다. 조 사장은 능력을 인정받아 2001년 LG전자 세탁기연구실장(상무)으로 처음 임원에 오른 뒤 2005년 디지털어플라이언스사업본부 세탁기사업부 부사장을 거쳐 2013년에는 HA사업본부 사장 직함을 얻었다. 한 우물만 파는 ‘전문성’과 늘 배우고자 하는 ‘성실함’,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호기심’으로 승부를 건 끝에 조직의 최고 자리에 오른 것이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지난 주 “고졸 출신도 교사로 뽑겠다”면서 ‘고졸 성공시대’ 정책을 발표했다.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하는 고졸 성공시대 정책은 학벌과 스펙보다는 능력 중심의 채용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고졸자의 취업을 장려한다는 내용이다. 우선 내년부터 시교육청 소속 기술직 공무원 채용 때 절반을 고졸 출신으로 뽑기로 했다. 그동안은 고졸자 선발이 30%선에 그쳤지만 이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또 전국기능경기대회 등에서 입상한 우수 기능을 보유한 고졸자는 고교 실기교사로 임용하기로 했다.
 
한국에선 1975~78년 4년간 중화학공업 육성책의 하나로 고졸자를 실업계고 실기교사로 채용한 전례가 있다. 지금도 법적으론 실기교사 제도가 남아 있지만 사실상 사문화됐다. 대졸자가 증가하자 4년제 대학 졸업자만 자격증을 가질 수 있는 정교사만 모집해온 탓이다. 교사들이 세분화된 공업기술을 다양하게 익히긴 어려워 산업현장 기술자를 강사로 초빙해 실기 수업을 맡기기도 한다. 실기교사는 이런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서울시교육청은 또 특성화고에서 가르치는 학과를 미래 유망 분야 중심으로 개편하고 선진국에서의 현장실습과 기술봉사 기회도 늘릴 계획이다. 고교에서부터 전문 직업교육을 제공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중심 사회의 기초를 닦겠다는 것이다. 학벌위주, 스펙 쌓기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바람직한 방향이다. 우리 사회의 과잉학력과 스펙쌓기 경쟁은 지나칠 정도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석·박사 학력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는 1%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취업자의 4.6%가 석·박사 학력을 갖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저물어가는 듯했던 금융권 ‘상고(商高) 전성시대’가 최근 다시 열리고 있는 것은 흥미롭고 고무적이다. 최근 취임한 진웅섭 신임 금융감독원장과 윤종규 KB금융그룹 차기 회장이 대표적인 상고 출신이다. 박인규 DGB금융지주 회장 겸 대구은행장, 손교덕 경남은행장, 이동대 제주은행장 등 올해 자리가 바뀐 지방은행장 3명 모두 상고를 나왔으니 제2의 상고 전성시대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진 원장은 동지상고를 중퇴한 후 7급 공무원으로 법무부에 근무하다 검정고시를 거쳐 행정고시(28회)에 합격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윤 회장 역시 광주상고를 나와 외환은행에 입사한 후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를 야간으로 졸업했다. 이들 뿐이 아니다. 시중은행 부행장들 가운데에도 상고 출신이 상당하다. 신한은행(6명)이 가장 많고, 우리ㆍ하나ㆍ기업은행에 각각 2명씩, 그리고 국민은행에도 상고를 졸업한 부행장이 한 명 있다. 각 은행 부행장이 3~10명 가량인 것을 고려하면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이다.
 
지난 1945년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상업학교를 택했던 젊은 학생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운명을 개척해온 사람들이다. 전쟁 직후부터 산업화 시기까지 상고에는 가난한 수재들이 몰렸다.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부산상고(현 개성고)·동지상고(현 동지고)는 3연속 대통령을 배출했다. 강경상고(현 강경상업정보고)·강릉상고(현 강릉제일고)·광주상고(현 동성고)·경기상고·경남상고(현 부경고)·군산상고·대구상고(현 상원고)·대전상고(현 우송고)·덕수상고(현 덕수고)·마산상고(현 용마고)·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제주상고(현 제주중앙고)도 명문으로 꼽힌다.
 
상업학교의 특성 때문에 졸업생 중 경제계 인사가 많다. 동대문상고를 졸업한 강덕수 STX그룹 회장을 비롯해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강경상고), 이학수 전 삼성 미래전략실 부회장(부산상고), 정연주 전 삼성물산 부회장(대구상고),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선린상고) 등 굵직한 인물이 즐비하다. 또 군산상고 출신의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 부산상고를 나온 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 덕수상고 출신의 김동수 전 수출입은행장 등이 금융권을 떠나면서 맥이 끊길 것이라 예상됐던 상업고등학교 출신 금융권 인사들의 고위직행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정계 인물은 동지·목포·대전·강릉·마산상고 등에서 많이 나왔다. 동지상고는 MB계, 목포상고는 동교동계가 주류다. 문인 중 소설가 복거일(대전)·이순원(강릉)·심상대(강릉), 시인 김수영(선린)·황학주(광주) 등이 상고를 나왔다. 이른바 ‘파워 엘리트’의 숫자만 놓고 보면 119년 전통의 부산상고가 1위이고 대구·선린·덕수·경기 등이 뒤를 잇는다.
 
이들의 입신양명 비결은 뭘까. 학자들은 산업화 시대의 ‘강한 성취동기’를 먼저 꼽는다. 그다음은 ‘경험의 폭과 친화력’이다. 15대 대선에서 목포상고의 김대중 후보가 경기고의 이회창 후보를 이기고, 16대 경선에서 부산상고의 노무현이 경기고의 김근태를 꺾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회계학적 소양까지 겸비했으니 엘리트의 조건을 다 갖춘 셈이다.
 
전통적으로 금융계는 학벌 좋은 사람이 많은 곳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최근 금융감독원장과 국내 최대 은행 KB지주 회장에 각각 검정고시, 상고 출신이 잇따라 취임한 것을 계기로 스펙 위주의 채용 관행이 바뀌는 계기가 될 지 관심을 모은다. 은행, 증권 등 금융업계에 대한 감독권을 행사하는 금융감독원은 '금융검찰'로 불린다. 이런 금감원장 자리는 그 동안 서울대 출신 고위 공무원이 도맡아 왔다. 그런데 처음으로 검정고시 출신 원장이 탄생했다.
 
진웅섭 금감원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모교이기도 한 포항 동지상고를 다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중퇴하고 고졸 검정고시를 봤다. 그는 이후 7급 공무원에 합격해 법무부 근무하다 뒤늦게 건국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 중에 행정고시에 합격했고, 금융검찰 수장 자리에 올랐다. 주로 정권 실세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왔던 KB금융지주 회장 자리도 이번엔 상고 출신이 선출됐다. 윤종규 회장은 광주상고를 졸업한 후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를 야간으로 졸업했다. 이후 회계사 시험에 합격해 삼일회계법인을 거쳐 KB지주 회장까지 올랐다. 출신 대학, 권력과의 관계 보다 능력 중심의 인사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을 지 기대가 되는 이유다.
 
금융권에서는 이같은 상고출신 금융권 인사들의 재부각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실력 중심의 평가가 주효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상고 출신 임원들은 가정 형편 등을 이유로 대학 진학 대신 입행을 선택했지만 어려운 경쟁여건 속에서도 학위 취득, 해외지점 근무 등으로 대학졸업자 못지않은 능력과 전문성을 쌓아왔다. 이후 이들은 1980년대부터 대학 졸업자들이 속속 유입되고,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치열한 경쟁 상태에 놓여 점차 입지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금융위기와 글로벌 재정 위기 등의 여건 속에서 당당히 실력을 인정받아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이같은 능력중심주의 인사가 보다 활성화돼야 한다. 학벌보다 능력을 앞세울 수 있는 곳이 금융권 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사교육으로, 입학 후에는 스펙 쌓기로 지출하는 돈과 사회적 낭비가 너무 심하다. 과잉학력으로 인해 국민총생산(GDP) 성장률이 1%포인트 상승할 기회를 상실했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고졸 학력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가 전체의 56.7%지만 취업자의 39.5%만이 고졸 학력자다. 심지어 환경미화원을 뽑거나 단순 사무직을 뽑는 채용공고에 석박사까지 몰려드는 실정이다. 과잉학력자의 하향취업으로 고졸자 취업시장이 열악해지는 것이다.
 
해결방법은 고교만 나와도 능력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졸자를 대상으로 한 일자리를 대폭 늘리고 또 고졸자와 대졸자간 임금 격차를 줄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특수고등학교를 지원하거나 공공기관에 고졸 채용을 장려하는 제도의 도입도 필요하다.
 
‘고졸 성공시대’ 시도는 서울시 교육청 차원의 노력 만으로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국가의 정책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취업준비생이 선호하는 대기업과 은행 등 금융기관 특히 공공기관에서 정책적으로 고졸 채용을 늘릴 필요가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고졸 취업을 정권차원에서 강조하자 고졸자를 대거 채용했던 금융권이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는 고졸 채용을 크게 줄이고 있다. 2012년 주요 은행에서 채용한 고졸 직원은 총 714명이었지만 2013년에는 480명으로 32.7%나 급감했고 올해는 더 줄었다. 경력단절 여성의 고용을 정권차원에서 강조하니까 고졸 채용을 줄이고 경력단절 여성 채용을 늘렸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학벌사회’의 벽을 깨고, 능력중심의 사회를 만드는 정책을 꾸준히 펴는 것이 중요하다. 고졸 성공시대를 열겠다는 서울시 교육청의 과감한 실험이 다른 자치단체와 공공기관은 물론 주요 대기업에까지 확산되길 기대한다. '고졸 성공시대’ 정책이 성과를 거두면 심각한 고학력 현상으로 낭비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능력 중심의 선진사회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서울이코미디어
  • 등록번호 : 서울 아 03055
  • 등록일자 : 2014-03-21
  • 제호 : 서울이코노미뉴스
  • 부회장 : 김명서
  • 대표·편집국장 : 박선화
  • 발행인·편집인 : 박미연
  •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58, 1107호(여의도동, 삼도빌딩)
  • 발행일자 : 2014-04-16
  • 대표전화 : 02-3775-4176
  • 팩스 : 02-3775-41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미연
  • 서울이코노미뉴스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1 서울이코노미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eouleconews@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