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는 해방후 '압축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게 됐다. 개발을 위한 내자동원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가명·무기명 금융거래 등 잘못된 금융관행이 묵인되어 음성·불로 소득이 널리 퍼진 이른바 지하경제가 번창했다.
이에 따라 계층간 소득과 조세부담의 불균형이 심화됐다. 재산의 형성 및 축적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져 우리 사회의 화합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장애요인이 됐다. 또한 비실명거래를 통해 부정한 자금이 불법 정치자금·뇌물·부동산투기 등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 위화감 조성은 물론 대다수 국민들의 근로의욕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비실명 금융거래의 오랜 관행에서 발생되는 폐해가 널리 번짐에 따라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여 금융거래를 정상화할 필요가 절실해 졌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과거 정권에서 부작용을 우려하여 실시를 유보하였던 금융실명제를 과감하게 도입했다. 금융실명제는 모든 금융거래를 실제의 명의(實名)로 하도록 함으로써 금융거래와 부정부패·부조리를 연결하는 고리를 차단하여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 이를 기반으로 금융자산에 대한 종합과세가 가능하도록 하여 공평과세를 이룩하고자 하는 제도다. 금융실명제는 이처럼 금융거래의 정상화라는 취지로 추진된 것이다.
정부가 금융 거래 때 얼굴을 보지 않고 하는 '비대면 실명' 확인을 허용하기로 한 것은 1993년 도입한 금융실명제 운용 방식의 근간을 22년 만에 손을 본다는 의미다. 인터넷·모바일 뱅킹 등의 발달로 비대면 거래가 늘어나는데 금융규제는 20여년 전의 오프라인 중심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따라 고객 불편은 물론이고 금융과 IT를 결합한 핀테크처럼 급속도로 진화하는 세계적인 금융환경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비대면 실명 확인 허용 방침은 1993년 도입한 금융실명제 노선을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크게 바꾼 것이다. 금융실명제는 금융회사와 거래할 때 가명이나 차명이 아닌 본인의 실제 명의, 즉 실명으로 거래해야 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인터넷에 기반한 거래기술이 발달하면서 금융소비자들이 은행창구에 나타나지 않는 일이 점점 더 일반화되고 있다. 현재 CD·ATM, 인터넷뱅킹, 텔레뱅킹 등 비대면 채널을 활용한 금융거래가 전체 거래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IT(정보기술) 발전에 힘입어 전자인증 등 대면 확인에 의존하지 않고도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이 늘어난 것도 대면 확인 노선을 버리게 한 요인이다.